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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 제64화 명동성당 - (1)「뾰족당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울 중구 명동2가 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명동성당이 축성(낙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1년전인 l898년5월의 일이었다.
이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상징적 존재로서 거기에 얽힌 사연이 참으로 많다.
한국에서 최초로 축성된 천주교회로는 서울 중림동에 세워진 낙현성당이 있지만, 낙현성당은 한국천주교에 기여한 면으로 보나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으로 보아 명동성당을 따를 수가 없을 것이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총본산으로서 명동성당사는 곧 한국천주교회사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명동성당이 서있는 자리를 옛날에는 「종현」이라 불렀다. 종현이란 『종이 있는 고개(현)』라는 뜻이다. 종현에는 지금의 보신각 종이 한때 매달려 있었다. l468년 조선왕조 세조14년에 만들어진 지금의 보신각 종을 처음 운종가(지금의 종로)의 종각에 매달아두고 그것을 쳐서 시각을 알렸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 종각이 불타고 없어져 종을 남대문 옆에 옮겨 달았다가 다시 종현으로 옮겼었다.
종현에서 지금의 보신각으로 종을 옮긴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탄 종각을 다시 짓고 난 후였다.
종은 그 자리에서 옮겨졌지만, 「종현」이란 이름만은 남겨져 그 종현에 한국 최초로 성당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명동성당은 1892년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Mutel)민주교에 의해 착공되었다. 낙현성당의 착공과 같은 해였다.
그러나 낙현성당은 비교적 순조롭게 공사가 진행되어 그 다음 해인 l893년에 축성이 되었으나 명동성당은 공사진척이 순조롭지를 못했다.
그것은 건축규모가 그만큼 더 커서 공정이 그만큼 까다로운데다가 건축기술자의 부족과 건축자금의 원만한 조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착공으로부터 준공까지가 무려 6년이 걸려 1898년에야 축성식을 거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명동성당은 한국에서는 최초의 고딕식 서양식 건물이어서 서울장안의 새 명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81년동안을 명동성당은 명동 마루턱 높은 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며 한국사회가 갖는 격변기의 많은 것을 지켜보아왔다.
한국사회에 있어서는 명동성당이 세워진 19세기말부터 오늘까지가 가장 심한 격동기였다. 한말의 어지러운 정치적 소용돌이, 일본의 한국강점, 식민지배하에서의 민족의 고달픔, 해방, 국토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 6·25사변, 4·19혁명, 5·16혁명,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중진국권에 올라선 오늘날까지의 숱한 이 민족의 애환을 다 지켜보아왔다.
지금은 서울시내에 고층건물이 숲을 이루다시피 해서 명동성당이 가려져 잘 안보이지만,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명동성당의 뾰족한 종탑이 서울시내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 바라다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동성당을 「뾰족당 집」이라 부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뾰족당 집을 바라보며, 혹은 위안을 얻기도 하고, 혹은 참회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은 그동안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면서 무언의 설교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명동성당에서 나는 35년동안을 살았다. l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12년 남짓을 봉직해왔고, 그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임명을 받아 25년간을 교구장으로서 일해온 곳도 명동성당구내였다.
모두 37년동안을 명동성당 구내에서 살아온 셈인데 그 37년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시기인 것이고, 내 인생은 그곳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맞이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명동성당이야말로 「내 인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동성당과 관련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남겨두어 다음 세대를 위한 증언으로 하고싶은 마음이 큰 것이다. <계속>

<한국 가톨릭의 첫 주교>
노기남 대주교(78)는 1901년12월13일 평양시 선교리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1917년 서울가톨릭신학교에 입학하여 30년1월18일 신부로 서품,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됐다. 천주교회 서울교구장이던 42년 한국가톨릭사상 첫 한국인주교로 승품됐다.
62년 대주교로 승품, 그후 37년동안 가톨릭을 위해 헌신하다 67년3월 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에 이어 우리 나라와 이탈리아에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0여차례 바티칸회의에 참석했다. 지금은 성나자로마을(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거주하며 구나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재단법인 국제한국연구원 이사장,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추모사업회 이사로 있다. 『나의 회상록』(69년) 『당신의 뜻대로』(78년)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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