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8) 국가대표 지각 입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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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출범할 때 애를 먹었던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최고의 선수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82년 9월, 제 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로 예정돼 있었다.

야구 종목으로는 한국에서 처음 치르는 세계선수권대회였기에 대한야구협회는 당연히 최우수선수들이 아마추어에 남아 국가대표로 활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프로야구로서는 초창기의 흥행이나 붐업을 고려해 스타 플레이어들을 최대한 끌어들인다는 방침이었다. 인기높은 우수선수들도 대부분 프로행을 원했다.

그러나 아마협회 측은 '정부 차원'에서 선수들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아마협회 임광정 회장은 "2년 전에 유치한 세계대회다. 국위 선양을 위해서라도 국가대표들의 프로 진출은 대회 이후로 미뤄져야 한다"고 청와대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와 이호헌씨 등 프로 측에서는 "진로는 선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협회는 청와대 쪽에 청탁을 계속했고 다시 청와대 이상주 수석으로부터 "아마추어 쪽의 편의를 봐주면 안되겠느냐"며 될 수 있으면 해당 선수들의 프로 진출을 세계대회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해왔다.

당시 대표선수 가운데 군 복무 중인 선수와 대학에 재학 중인 선수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실업에 소속된 선수들이 문제였다. 이들 가운데 최동원과 박종훈은 자진해서 프로 진출을 1년 뒤로 미뤘다. 롯데 소속이었던 최동원은 실업롯데가 해체되면서 한전으로 옮겼고, 고려대 4학년이었던 박종훈은 졸업 후 프로 대신 상업은행을 택했다.

그러나 김재박.이해창.심재원(이상 한국화장품)과 유두열.임호균(이상 한전)등 다섯명은 입장이 달랐다. 나는 서종철 총재의 결재를 얻어 이들의 보유권을 지닌 3개팀(MBC.롯데.삼미)으로부터 "세계대회가 끝날 때까지 프로 입단을 연기해도 좋다"는 합의를 얻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프로에 가서 뛰고 싶다"며 술렁거렸다. 그 바람에 대표팀의 대만 전지훈련이 연기되는 일도 발생했다. 당시 아마협회의 박상규 전무는 "프로가 사탕을 먹였으니 프로가 나서서 달래라"며 나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결국 나는 이들 5명의 선수를 서울 영동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이해창이 이들의 리더였다.그는 시원시원한 성격에다 붙임성이 좋았다.나도 그런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제의를 했다.

"매달 50만원씩 주마. 프로에서 뛰지도 않으면서 매달 너희가 지금 받는 월급보다도 많은 돈을 주겠다는 것은 너희를 그만큼 아낀다는 거다. 세계대회가 끝나는 9월까지 지급할테니 그 뒤에 프로에 와라."

그러자 이해창은 펄쩍 뛰며 손을 가로저었다. 선수들끼리 약속하고 나온 액수가 있는 듯했다. 그는 "50만원은 너무 적어요. 백만원씩 주세요"라고 맞섰다.

나도 얘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좋다. 1백만원씩 주마. 대신 세계대회에서 꼭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며 이들 다섯명에게 선전을 부탁했다. 이들 다섯명은 프로에서 뛰기도 전에 프로로부터 돈을 받아낸 진정한(?) 프로였다.

이들은 모두 국가대표로서 열심히 뛰었고, 결국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등으로 대표팀은 첫 세계대회 우승을 이뤄냈다. 그로 인해 이들의 프로 진출은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이용일(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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