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은 누구인가| 탄생백주기념 강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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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생동안 국적을 4번이나 바꾸어야 했던「아인슈타인」의 생애는 과연 과학자에게 조국이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흔히들『과학에는 국적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적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적으로 대답하기에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만큼 「델리킷」하다. 그것
은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내용이나 그 업적이 궁극적으로는 인류와 자연이라는 거시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개인으로서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배경을 이루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의 평화주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살인하는 행위가 가슴이 터질정도로 싫다는 이유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 감정이다. 평화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 지적이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온갖 종류의 잔인성과 증오감에 대한 나의 생리적인 반감`에 깊이 뿌리를 두고있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갈망을 밝힌 「아인슈타인」은「세계인」 「세계정부」를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그의 상대성이론 못지않게 세상에 충격을 줬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런트·러셀」과 더불어 발표한 이른바「러셀-아인슈타인 평화선언」 은 전세계 지식인의 평화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과학자들의 평화서명운동을 이끌었던것은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 의 이같은 평화에 대한 열망은 2차대전을 종식시켰던 「히로시마」 의 원자폭탄 투하가 초래했던 비극이 너무나 참담한 것을 목격하면서 더욱 강렬해졌다.
가공할 원자탄의 등장이 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물질과 「에너지」 는 같다』 는 「아인슈타인」 공식 (E=mC)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미국에 이주한후 39년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나치」독일에 앞서 원자폭탄을 제조하라고 강력히 건의한 장본인이었기때문에 「아인슈타인」 의 후회와 고뇌는 컸다.
독일·「스위스」·독일·미국등 4차례나 국적을바꾸고 비록「세계인」을 주장한 「아인슈타인」 이지만 본질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을수는 없다. 유대인이라는 사실때문에「나치」독일의 픽박을 받고 끝내는 독일국민으로서의 일체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한「아인슈타인」 의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는 유대인이라는 의식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초대대통령 「바이츠만」 (그는 유명한 화학자였다)이 「예루살렘」에 「헤브루」대학을 건설하기 위해「아인슈타인」 의 협력을 요청하자 그는 많은 주위사람의 만류를 뿌리치고 「바이츠만」을 도왔던 것이다. (「바이츠만」은 나중 「아인슈타인」에게「이스라엘」의 제2대 대통령이 되어 달라고 간청했으나 「아인슈타인」은 이를 거절했었다).
이렇듯 「아인슈타인」이 민족주의적인 「시오니즘」운동에 적극 참여하자「세계인」과 평화주의를 제창한 그로서 모순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아인슈타인」 은 유대인이었고 그의 조국「이스라엘」의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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