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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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청하현 현감은 부임한 지 2년여 동안 꽤 많은 금은보화를 모았다. 벼슬 한 자리 달라고 부탁하는 자들로부터 받은 뇌물들뿐만 아니라 소금, 차, 명반, 향약, 동철, 주류 등 나라에서 전매하는 물품들을 팔아 슬쩍 빼돌린 돈들로 재물을 모은 것이었다.

3년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현감은 좀더 나은 벼슬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조정의 실력자들에게 뇌물을 써야만 하였다. 결국 자기가 뇌물로 쓸 재화를 모으기 위하여 뇌물을 받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모은 금은보화를 어디로 옮겨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조정의 실력자들에게 뇌물로 쓸 재화이므로 이왕이면 수도인 동경(東京)으로 옮겨놓는 게 상책이었다.

현감은 동경에 사는 친척집으로 그 재물을 일단 옮겨놓기로 하였다. 그리고 현감 자리에서 물러날 때는 임기 동안 재산을 전혀 불리지 않고 청빈하게 살아온 것처럼 보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청하현에서 동경까지는 먼 거리라 재물을 옮기는 도중에 도적이나 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었다. 현감은 포도대장 무송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동경에 친척이 한 분 사시는데 성함은 주면이라고 하고 전전태위 벼슬에 계신다네. 내가 그분께 문안 편지를 올리고 선물을 좀 보내려고 하네. 그런데 포도대장도 알다시피 요즈음 도적과 강도들이 설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청하현에서 동경까지 가는 길이 보통 험해야 말이지. 그래서 아무래도 자네가 좀 다녀와야겠네. 이번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면 내가 크게 상을 내리겠네."

"상이라니요? 저는 이미 현감님의 은혜로 큰 상을 받았는데 무슨 상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당연히 다녀와야죠. 아직 동경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이번 기회에 동경 구경도 하고요. 동경으로 보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감은 무송에게 술 석 잔을 내리고 여비로 은 열 냥을 주었다. 무송은 이번 일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제법 오래 걸릴 텐데 무대 형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야 도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형수를 다시 본다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무대 형을 주막 같은 데 따로 불러내어 인사를 드리고 갈까 생각도 하였으나 결국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 형수도 지금쯤은 자기 행동을 뉘우치고 있을지 몰랐다.

게다가 무송 자신에게도 전혀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번만큼 형수와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도 힘들 것이었다. 먼 길을 앞두고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아무리 마음에 응어리가 져 있다 해도 차마 박대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무송은 사병을 시켜 술 한 병과 안주거리를 조금 사오게 하여 사병과 함께 무대의 집으로 향하였다. 마침 무대도 호떡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송을 만나 둘이서 같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무대와 무송이 집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금련이 기겁을 하며 무대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내가 뭐랬죠? 당신이 동생을 만나면 나도 당신을 보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아, 그게 아니라 동생이 먼 길을 떠난다고 인사를 하러 온 거요."

먼 길이라는 말에 금련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먼 길이라니요?"

"형수님, 형님께는 말씀드렸지만 이번에 현감의 심부름으로 동경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길이 멀고 험하여 꽤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것 같아 이렇게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저에게 노여움이 있었다면 이번 기회에 푸시지요."

무송은 자기보다 세 살 아래인 금련이지만 형수 대접을 깎듯이 해주며 화해를 청하였다.

"오랫동안 보지 않게 되어 다행이군요."

금련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송을 바라보는 눈길은 어느새 이전처럼 변해 있었다. 무송은 애절하게 호소하는 듯한 금련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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