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스 이중 공습…홍콩 경제 '혼수 상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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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질 때문에 지난주 매출이 50%나 줄었고, 이번주엔 70%까지 추락했다."

홍콩에서 의류사업을 하는 팡강(方剛)씨(토피 인터내셔널 대표)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급격한 영업위축은 方씨만의 괴로움이 아니다.

이달 들어 백화점.시계.보석.음식업체들의 매출도 60~70%나 급감했다. 백화점 관계자들은 "지난 30년간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사태"라고 입을 모았다.

주권 반환 이후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지출 급증으로 해마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쌓이면서 '홍콩발 경제위기'의 우려마저 낳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전쟁과 전염병인 사스(SARS)의 여파까지 겹쳐 요즘 홍콩경제는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행정장관인 둥젠화가 "홍콩의 경제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며, 적시에 회생책을 내놓지 못하면 홍콩의 달러화가 투기세력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할 정도다.

경제학자들은 "엄청난 재정적자에 전쟁과 전염병 등 악재가 겹친 홍콩은 경제위기의 변수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듯한 모습"이라며 "한때 아시아의 베니스로 자리매김했던 홍콩의 몰락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깊어지는 '불황의 골'=이라크전과 괴질이 아니더라도 홍콩 경제는 이미 쇠락의 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1997년 주권 반환 이후 홍콩 경제는 상하이와 베이징에 밀리면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동남아지역의 금융 및 무역 중개지로서의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홍콩 경제의 위기요인을 ▶4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디플레이션과▶급증하는 재정 적자▶대 중국 중개무역지로서의 역할 감소 등 3가지로 크게 요약하고 있다.

홍콩의 부(富)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부동산 값이 97년에 비해 60% 이상 떨어져 가계의 부는 3천6백억달러나 줄어들었다. 소매물가는 46개월 연속 하락했다.

경기침체로 조세수입이 줄어들면서 2002 회계연도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5.5%에 이르는 7백억홍콩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가뜩이나 장기불황으로 7%대의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는 판에 항공.호텔.유통.서비스분야에서는 감원이 늘어나 새로운 실업자들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시티그룹은 지난 7일 "사스로 인한 위기가 조기에 해결돼도 홍콩.싱가포르의 GDP성장률은 1%포인트 이상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추락하는 '클린 시티'의 이미지=사스가 홍콩을 통해 전세계로 확산하면서 '깨끗하고 안전한 국제도시'란 이미지에도 금이 가고 있다.

홍콩에서 해마다 열리는 '가정용품 전람회'와 '선물(膳物)전람회'에도 상당수 외국업체들이 불참 의사를 통보하고 있다.

홍콩 명보의 샤타이닝(夏泰寧)부국장은 "경제적인 손실 못지 않게 무형(無形)의 자산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사스 확산에 따라 외국의 기업인들이 홍콩 방문 계획을 연기하거나 '홍콩은 아태지역의 거점 도시'란 인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무역.관광.금융.서비스분야는 장기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려되는 투기자본의 움직임= 홍콩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20년만에 대대적인 세금 인상안을 내놓았다. 올해만 1백40억홍콩달러의 세금을 더 걷을 계획이다. 그래서 2008년께 '균형 재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사스의 여파로 불황이 심해지자 세수(稅收)는 줄어들고, 실업수당과 의료비 지출은 급증해 씀씀이가 더 많아졌다.

홍콩 업계에선 당장 "세금을 내려 경기를 부양하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홍콩 정부로선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이 "재정적자가 계속될 경우 신용등급을 내리겠다"고 경고한 것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만약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홍콩 달러값이 떨어져 금융분야에서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홍콩 경제의 불황이 심화되고, 재정적자 사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국제 투기자본의 홍콩달러화에 대한 공격이 재연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미국 달러에 1대 7.79로 고정된 홍콩달러화의 통화가치가 흔들리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홍콩발 금융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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