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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꼬리 무는 노인 방화 … 복지망 강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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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동우
인제대의대 백병원 교수
정신건강의학

비가 오면 퍼붓게 마련이란 말처럼 세월호의 충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중한 인명을 앗아가는 안전사고들이 반복되고 있다. 전남 장성에서는 심야에 요양병원 화재로 21명이 사망했고, 서울 지하철 객차 안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사건들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두 사건 모두 70세가 넘은 노인들이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는 것이다. 논어의 한 토막.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세상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70세가 넘었으면 이 정도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충동적인 행동은 없을 거라고 여겨지는데, 이번 사건들은 이런 통념을 깼다. 게다가 요양병원 사건에서는 사회적 약자이자 보호의 대상인 치매 환자가 방화 용의선상에 올라 있다.

 방화범 정신병리 연구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방화는 노인보다는 젊은 연령에 많다. 자주 동반되는 정신질환은 성격장애·물질의존·정동장애(기분이 너무 좋거나 나쁜 정신장애) 등이다. 이번 사건처럼 노인, 특히 치매 노인이 방화 용의선상에 오른 것은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도 이례적인 것이다.

 방화는 정신병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으로 알려져 있는 분노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다. 특히 방화 행위를 유발하는 분노는 매우 파괴적이며, 그 기저에는 만성적인 욕구의 좌절, 그런 상황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절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피해의식과 낮은 자존감, 그리고 자기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치는 기법의 부족 또는 충동조절능력의 부족 등이 함께 얽히면 만성적인 좌절감을 더 악화시키고, 이것이 분노를 더욱 증폭시켜 방화 행위에 이른다는 것이다.

 서울 지하철 방화사건의 용의자는 건물주와의 다툼으로 10년 가까이 소송을 했고, 판결 내용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욕구 좌절과 만성적 절망감으로 인한 분노 폭발이 방화로 나타났다. 장성 요양병원 방화 용의자의 경우도 입원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노인들마저도 방화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사건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신병리 차원에서의 대책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대책이 있어야 하겠다. 무엇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해소와 인식 개선을 통한 치료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2011년의 전국 정신질환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신질환 치료율은 15%에 불과하다. 85%의 환자들이 자신에게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는지 몰라서, 혹은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노년층의 인식 부족과 편견이 심해 이를 타개할 인식 개선 대책이 필요하다.

 분노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란 간절히 원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불일치에 의해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가 노인들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축적된 삶의 지혜 덕분에 노인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현대사회에는 급속한 변화로 인해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질병·빈곤·고독이라는 삼고(三苦)에 이어 역할 상실이라는 네 번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노인들은 ‘한강의 기적’의 주역들로서 젊은 시절을 국가 경제 건설과 자녀 교육에 바친 분들이다. 당신들의 부모님들을 스스로 극진히 모셨기에 노후에는 당연히 자녀들의 부양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별다른 노후 준비 없이 노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동안 세태가 변해 노부모 부양의 상당 부분이 국가와 사회의 책임으로 바뀌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국가적 시스템은 아직 허술한 편이다.

 어정쩡하게나마 기초연금이 시행을 앞두고 있다. 고령사회를 대비한 돌봄 대책으로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출범한 지 6년이 됐다. 이 제도 덕분에 중증의 질병과 장애를 동반한 다수의 노인이 집이 아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이번 사건에서 보듯 노인들의 욕구를 충족하고 안전을 보장하기엔 미흡한 부분이 많다.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운영자들이 안전 설비에 충분히 투자할 수 있게 유인책을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못해 비극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가 나서 요양병원 및 요양원의 기능 보강 사업을 신속히 실시해 이들 시설이 가정과 같은 환경(homely environment)을 갖추도록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독립된 공간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대인관계 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유닛 케어(Unit Care)의 도입, 간병비 건강보험 적용 등의 대책들도 고려돼야 한다.

 기초연금만으로는 노인의 소득을 보장할 수 없다. 정년 연장과 연계해 임금피크제를 확대 실시해 고령자 고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대책들이 하나하나 시행돼야 노인들의 극단적 행위를 막을 수 있다.

이동우 인제대의대 백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