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당 투기하듯 거래해서야…|본사 「시리즈」 『오늘의 한국 화단…』을 읽고|윤재근(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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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간과 그림과의 관계는 사치나 장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한 양식에 속한다.
글자가 그림(부적)이 되었고, 제단에 그림을 두고 믿기도 했다. 그림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림은 우리에게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릇에도 그림이 있었고 베갯모와 가구에까지도 그림이 있었다. 이처럼 그림은 우리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문물과 접하면서 그림의 존재 이유가 변화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림 그 자체의 영역도 넓어져 무게 동양화와 서양화라는 두 줄기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림의 유통과정이 달라지게 되었고 화가의 창작의도 역시 변질되어 왔다. 특히 70년대에 들면서 그림은 하나의 특수한 상품처럼 전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기인한 셈이겠다.
그림을 매매하는 화랑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오늘날 화랑은 없어서는 안된다. 화가의 고객을 이어주는 다리구실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화단을 서글프게 하는 것은 진정한 화랑의 역할이 빈곤한 사실 때문에 빚어진다.
화랑은 먼저 누가 진정한 창조자로서의 화가인가를 판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화가를 보호하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그에게 철저히 봉사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고객에게 연결시키면서 얼마의 봉사료를 받는다는 헌신적인 사명감이 앞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이 투철한 화랑이 우리에게 몇이나 있겠는가? 그 대답은 부정적일 것이다. 또한 화랑은 잠재력이 있는 화가를 발견하여 그의 작업을 그의 창조정신에 따라 계속할 수 있도록 헌신적인 희생을 하여 문화의 발전을 자극해주는 기여마저도 해야한다.
이러한 화랑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 역시 부정적일 것이다. 이러한 이상론 적인 사명과 기여를 제쳐놓고라도 잘된 그림과. 못된 그림을 작품자체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화랑은 시급히 갖추어야 할 것이다.
화가의 이름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화랑은 장차 없어져야 할 것이다. 고객을 이용하고 나아가 화가를 이용하려는 작태 역시 사라져야 하고 그림을 작품으로 보지 못하고 상품인 양 착각하려는 무서운 버릇도 없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림 값이 얼마냐 하는 작태가 빚어지는 것이다. 그림 값은 작품 그 자체에 달려야 한다. 가치 있는 작품의 값은 비쌀 수밖에 없으며 또 당연하다. 그러나 화가의 지명도나 인기도에 따라 값을 매기려고 하니 한심한 것이다.
더구나 그림을 평가해야하는 평자들이 화가의 인기를 높이려고 정실화 되어있을 때 상업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목격하게된다. 그렇게 정해지는 값을 매기기 위하여 넒은 집터가 비싸듯이 넒은 그림이 비싸지는 호수 계산법을 창피한 줄 모르고 당연시하는 판이다. 한 호에 얼마냐에 따라 화가의 서열이 정해지고 만다.
위대한 화가는 위대한 작품을 남겨야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은 무값이어도 당연하다. 그러나 팔려고 이미 그려진 허술한 그림일지라도 그 화가가 교수이거나, 수상경력이 있거나, 도불한 일이 있으면 호당 가격이 비싸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화랑의 안목이 분명하고 고객이 미술품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림을 대한다면 그림이 유명 「메이커」의 상품처럼 매매되지는 않을 것이다.
장 모 화백의 그림이 비싸다는 말을 듣는다. 교수화가나 귀국전으로 한몫 보려는 관광 화가의 그림 값에 비하면 오히려 싼 편이다.
40여년 그림에만 정진했고 진정한 작품을 낳으려고 수십 번 지우고 그리는 고통을 그는 택하기 때문이다. 이중섭·박수근씨도 그림만 그렸다. 그러한 화가를 우리는 존경해야 할 것이고 그들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값진 것이다. 값지면 비싸도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그림들이 작품 이외의 요인 때문에 비싸게 매겨지는 그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그림 값에 관한 한 화가도 자신을 반성하고 화랑도 특수한 직분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불미스러운 작태는 그림을 소장하려는 고객의 수준에 달리게 된다. 부동산 투기를 노리는 그러한 생리로 그림을 투자로 사들이는 고객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눈이 어두워 가짜를 샀다고 동동거려도 동정이 가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를 가질만한 눈이 없기 때문이다. 손에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장사하는 화랑주의 달변가지고도 되지 않는다.
진짜를 가지려면 먼저 그림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이 앞서야 하고 벽에다 걸어 놓고 남모르는 정을 한없이 통해보고 난 다음에야 그림이 얼마나 값진 존재인가를 감지하게 될 것이다.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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