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의 보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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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초가는 우리농촌의 고유한 정취를 담은 하나의「심벌」이 되고 있다.
소복이 덮인 이엉, 어느 모로 두드러지지 않은 순박한 곡선, 게다가 진흙으로 바른 벽하며… 모두가 꾸밈과 과장이라고는 없는 삶, 그대로의 모습이다.
가식 속에 갇혀 사는 오늘의 사람들에겐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향수로, 아니면 따뜻한 삶의 현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초가의 앞마당에서 쓰던 절구통 하나·맷돌 하나에도 요즘의 사람들이 애착을 갖는 것은 이를테면 옛 생활에의 향수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초가 속의 삶은 먼 눈으로 감상(?)하는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목가적인 것도, 고유도 아닌 불편과 군색스러움과 때로는 어두운 실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근대화의 안간힘 속에서 지붕개량사업을 서두르는 것도 실은 그 모든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최근 당국이 농촌의 몇몇 마을을 초가보존지역으로 지정, 그것을 보호하려는 운동을 곁들이는 것은 새삼 격세의 감회를 느끼게 한다.
농촌의 주 생활개선은 아직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과제이지만 한편에서는 초가보존을 운위하게끔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현상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다.
초가를 하나의 박제로 보존한다면 그것은 흉가와 다를 것이 없다. 생활이 없는 집을 한 채도 아니고 몇백 채씩 보존한다는 것은 공연한「센티맨털리즘」일 뿐이다.
그 속에 사람이 생활하면서 함께 보존하는 것이라면 응당 이에 따르는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맞춘 변화의 추구다.
가령 문에는 창호지를 바르더라도, 그 안에는 유리를 끼워야할 것이며, 구들과 강판은 그대로 하지만 연탄「보일러」의「코일」은 깔려 있을 수도 있다. 마당 한구석엔 우물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수도꼭지가 부엌에까지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지붕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엉은 그대로 있어도 그 바닥엔 하다못해「비닐」이나「루핑」은 깔려야한다.
이런 마련이 없이는 초가보존이 별 의미가 없다. 우선 그 속에 사는 사람부터 초가생활에 대한 애착이나 편리를 가질 수 있어야 제대로 보존이 될 것이다.
당국은 막연히 초가보존지역의 지정만으로 그것이 보존되리라고 믿는다면 머지 않아 초가는 제풀에 사라지거나 흉가가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차라리 초가의 외양은 알뜰히 보존하고 그 속의 생활은 개선하는 방안을 생각해 봄직도 하다. 초가의 보존이 생활의 고역이 된다면 참「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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