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31)|함춘원시절(제59화)|백의의 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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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간호복무는 기술보다 정신이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봉사적 정신·희생적 정신이 즉「나이팅게일」 정신이요, 간호정신이다. 그러므로 만일 나에게 간호복무의 비결을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감히 대답하리라 즉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 셋째도 또한 친절이라고.』 1958년 3월 서울대 간호학교 졸업식에서 나는 이렇게 역설했다.
병의 치료가 간호 여하에 따라 영향을 받는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간호를 잘하면 죽을 사람도 산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말을 바꾸어보면 「간호를 잘못하면 살 사람도 죽는다」는 뜻도 된다. 간호원의 임무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병원장 시절 나는 아직도 간호학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간호교육을 대학의 간호학과로 승격시키는데 미련이 남아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드디어 1959년 2월 서울의대부속간호학교는 서울의대간호학과로 승격됐다. 그리고 4월 첫신입생을 모집했다.
공로자는 뭐니뭐니해도 간호과장에 취임한 이귀향 교수였다. 물론 이야기한바 있는 「ICA·미네소타」 계획에 의한 미측 자문관 「로우」 여사의 지원이 결실을 본 것이다.
이교수는 이 교육원조 계획의 일환으로 56년 「미네소타」 대학에 유학, 간호교육 및 행정을 연구하고 돌아와 간호학과 승격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와함께 홍려신 최애왕 이성학 유혜수 조봉섭등과 이송희 강윤희 김은숙 간호원들이 「미네소타」 대학에 가서 l. 2년 동안 연수하고 돌아와 초창기 간호학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 간호학과는 그야말로 희생심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백의의 천사」를 배출할 만큼 수준 높은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1910년 대한의원 부속의 학교에 설치된 산파과 및 간호부과는 사실 보잘것이 없었다. 교육도 교육이지만 하도 응모자가 없어서 학비를 주고 모셔가는 판이었다.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원은 1891년 성공회선교부의 간호사업을 위해 온 「에밀리·히드크드」양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호원이 양성되기는 1902년 미국의 감리교 부인회에서 선교간호원 「에드먼드」양이 와서 1906년에 보구여관에서 2명의 간호원을 교육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정식 간호원교육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에 따라 대한의원부속의 학교를 조선총독부의원의학강습소라 개칭하고 외과와 함께 조산부과와 착호부과를 두면서부터다.
1913년에 처음으로 간호부과 제1회 졸업생 9명이 탄생했다. 함춘원에서 배출된 간호원의 효시인 것이다. 경의전 부속의원이나 성대의학부 부속병원이나 간호부양성소를 두었는데 입학자격은 고등소학교 또는 보통학교 고등과 졸업자로 16∼25세의 미혼여성으로 규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관비에 의한 2년제 급비생 제도였다. 병원내 기숙사 제공은 물론 식비·피복비·잡비등 일체를 지급했다. 그 대신 졸업후 2년 동안 병원에 근무해야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어떻든 이렇게 해서 해방당시까지 함춘원을 거쳐나간 중졸업생수는 9백80명에 달한다.
그리고 해방후 간호부라는 명칭도 간호원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앞서 언급한 일이 있지만 다소 엉성했던 간호교육이 제대로 대학교육의 모습과 내용을 갖춘것은 「ICA·미네소타」 원조계획덕분이다.
1946년 국립서울대의대가 되면서 2년제 간호원 양성소는 3년제로, 그러고 50년부터 학교이름을 간호고등 기술학교로 바꾸었다. 그후 59년의 대간호학과로 승격되면서부터 4년제가 되었으니 본격적인 간호교육이 시작된지도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63년부터 76년까지 간호학사 7백13명이 배출됐고 간호석사학위 수여자는 24명이다 (64년부터 석사과정 시작). 한편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간호원은 42명으로 적은 숫자는 아니다.
간호학과가 함춘원의 여주인공으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있는 것은 이귀향 교수를 비롯한 「미네소타」 연수파와 함께 60년부터 「차이나·메디컬·보드」에서 미국으로 유학시킨 홍려신 이은왕 홍경자 이소우등의 역할이컸고 「희말라야」 대학병원에서 6개월 동안 착수하고 돌아온 박정호(서울 대학교 병원 간호부장)의 공헌이 컸기 때문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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