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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공 뉴스클립] 인도 어린이, 수학만 잘하는 게 아니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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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2014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 비(영어철자맞히기 대회·이하 스펠링비)’에서 또 다시 인도계 학생이 우승했다. 2008년 이후 벌써 7년 연속이다. 특히 올해는 52년 만에 공동우승이 나왔는데, 둘 다 인도계 미국인이었다. 1925년 시작한 스펠링비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어려운 단어가 출제되기 때문에 단순 암기로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어원 등 패턴을 익히는 방식으로 대회를 준비한다. 주최국 미국 뿐 아니라 한국·일본·중국 등 10여개국에서 지역 예선을 거쳐 선발된 281명이 올해 본선에 진출했다. 전 세계 만 15세 미만 학생 1000만명 가운데 뽑혀 나온 학생들이라 다들 출중했지만 단연 인도계가 돋보였다. 대체 비결이 뭘까.

스펠링비 대회에서 인도계 학생들의 강세가 뚜렷하다. 올해도 우승자는 물론 결승에 오른 12명 중 6명이 인도계였다. 올해 공동우승자인 인도계 안순 수조(왼쪽)와 스리람 하스와르(위 작은 사진). [사진 윤선생]

지난달 29일 오후 10시 30분(현지시간). 워싱턴 D.C 인근 게일로드 내셔널 리조트 컨벤션센터. 스펠링비 결선에 오른 281명 중 최후의 2인으로 남은 스리람 하스와르(14)와 안순 수조(13)는 우열을 가리지 못해 계속 승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최종 결승에 오른 12명 가운데 10명이 탈락한 뒤에도 이 두 사람은 6번 더 재대결을 벌였다. 결국 주최 측은 마지막으로 한 단어씩을 더 낸 뒤 둘 다 맞히면 공동 우승을 선언하기로 했다. 먼저 무대에 오른 하스와르는 주어진 스티커미씨어(stichomythia·고대 그리스 극에서 두사람이 한 행씩 번갈아가며 하는 대화)의 철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이어 마이크 앞에선 수조 역시 퓌이튼 (feuilleton·프랑스 신문의 문예란)의 철자를 정확하게 맞혔다. 역대 4번째이자 1962년 이후 처음으로 공동우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공동우승은 드물지만 인도계 학생이 스펠링비에서 우승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최근 10년 동안 8번, 2008년 이후엔 무려 7년 연속이다. 주최 측은 “결국 미국인”이라지만 인도계의 두드러진 성과는 수많은 이민자가 모여 사는 미국에서도 연구대상이다. 교육열 높은 아시아계, 원래 알파벳 문화권인 영미권 학생이 즐비한데 유독 인도계가 스펠링비 대회를 휩쓰는 이유가 뭘까.

스펠링비 총책임자인 페이지 킴블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어원 등을 토대로 유추해 맞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인종적 특성이 있다기보단 교육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계 부모는 어릴 때부터 자녀에게 철자 훈련을 많이 시킨다는 얘기다.

노스웨스턴 대학 인류학과에서 아시안계 미국인 관련 연구를 하는 인도계 샤리니 샨커 부교수도 “1965년 이후 미국에 온 인도 이민자 중엔 영국 영향을 받아 교육수준이 높고 경제력도 좋은 북인도쪽 사람이 많다”며 “자녀가 미국사회에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전반적인 교육열이 높고, 특히 그런 성과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철자 대회 등에 공을 들인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 통계청이 2013년 이민자를 조사한 결과 전체 이민자 중 학사 이상 비율은 28%였지만 인도계 이민자 중엔 76%나 됐다. 또 전문직 비자(H-1B) 중 64%가 인도 출신이다. 학력이 높은 만큼 소득 수준도 높다. 이민자 평균 연 가계소득은 4만6983달러지만 인도계 이민자는 10만450달러다.

스펠링비 대회가 단순히 아이들 학업 관련 경시대회가 아니라 미국에선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는 쇼라는 점도 인도계를 자극하는 요소다. 결승전은 ESPN 채널을 통해 약 2시간 동안 생중계된다. 우승자는 3만3000달러 상금을 받고 NBC 아침 토크쇼에 출연하기도 한다. 백악관도 공식 트위터를 통해 우승자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길 정도다. 학업에 도움이 되면서 전국적 관심도 받게 되니 점점 더 학부모가 열심히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다.

샨커 부교수는 “수학·과학 등 다른 대회도 많지만 이런 경시대회와 달리 스펠링비는 하나의 인기 쇼”라며 “대회 우승자는 유명인사가 되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역대 우승자를 보면 대체로 이런 분석이 맞아떨어진다. 2008년 챔피언인 사미어 미쉬라(콜롬비아대 경제학과) 아버지는 유전공학 박사이고 어머니는 동물학을 전공한 인디애나 대학 교수다. 그의 누나는 스펠링비 대회에 3년 동안 본선에 올랐고 그 역시 4년 참가해 4번째에 우승했다. 그는 “부모님은 평소 재물은 없어질 수 있지만 교육은 평생 간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저녁 먹을 때 아버지는 오늘 배운 단어와 그 스펠링은 무엇인지 늘 확인했고 어머니는 일주일 동안 공부한 양을 체크하곤 했다”고 말했다.

2012년 우승자인 스니그다 난디파티 역시 소프트웨어 컨설턴트인 아버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약 3만 여개의 단어를 플래쉬 카드로 만들어 딸을 도왔다.

결속력 좋은 인도계 이민자들은 집안에서만 자녀를 돕지 않고 아예 그들만의 경연대회를 만들기도 했다. 1993년 생긴 NSF(North South Foundation)는 인도계 학생만 출전하는 대회로, 스펠링뿐 아니라 수학·과학·지리 등도 겨룬다. 미 전역 12개 지역에서 예선을 치른 뒤 200여명이 본선에 진출한다. 2003, 2008, 2009년 챔피언이 NSF 출신이다. 올해 우승자 하스와르도 NSF에서 두번 우승한 경력이 있다.

7년 전에는 스펠링비 대회와 유사한 사우스 아시안(South Asian)이란 대회도 생겼다. 이 대회에는 인도계 뿐 아니라 파키스탄·스리랑카 등 남아시아계 미국인이 다 출전한 다. 올해 우승자 중 다른 한 명인 수조가 이 대회 출신이다.

부모의 높은 교육수준과 교육열, 이게 전부일까. 하나가 더 있다. 2002년 스펠바운드(spellbound)라는 영화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만큼 인기를 끌면서 인도계 아이들에게 스펠링비 대회는 ‘꿈의 무대’로 각인됐다. 이 영화는 1999년 스펠링비 대회에 출전한 청소년 8명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주인공 중 한명이 그 해 우승자인 인도계 나푸르 랄라다.

2009년 스펠링비 챔피언인 카비아 시바샹카르(콜롬비아대 의학과)는 “2004년에 이 영화를 보고 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카비아의 동생 반야 역시 올해까지 모두 4번 스펠링비 본선에 참가했다.

한편, 지난 2월 영어교육 전문기업 윤선생이 후원한 국내대회에서 우승해 본선에 진출한 이성준(인천진산중 2)군은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워싱턴=심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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