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노사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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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고 있노라면 때로 딱한 생각도 든다. 며칠 전에도 수천 명의 「런던」시민이 귀가 길의 교외선열차 안에 갇혀 오랫동안 꼼짝 못했다. 무슨 큰 사고가 나서가 아니다. 당직 신호수가 돌아앉아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사람의 다도도 일본사람만큼이나 야단스러운 것이지만 이 신호수의 경우는 월급인상을 위한 1인 태업의 한 방편이었다. 선례가 생기자 이제는 다른 신호수들도 근무 중 「마시고 싶을 때」언제라도 차를 끊여 마시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열차 통근자들은 그 「마시고 싶을 때」가 정확하게 출퇴근의 「러시아워」와 일치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영국의 중산층 이상은 『옛날이 좋았다』고 말한다. 또 한국 일본, 심지어는 중공의 노동자들을 부러운 눈치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노동자들은 그런 소리 말라는 것이다. 영국처럼 전통적 계급사회의 구조가 지독스럽게 엄격했던 나라에서 그 구조가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는 노동자들의 눈에는 「옛날」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동안 수천명이 열차 속에 갇혀서 기다려야 해도 미안할 것 없다는 배짱들이다.
허물어져 가는 것 중에는 「임금의 기준」도 들어있다.
요즘 「후리트」가에서 일어난 언론인들의 파업의 「슬로건」은 『우리도 인쇄 노조만큼 월급을 달라』는 것이었다.
신문사에서 「화이트·칼러」인 기자가 「블루·칼러」인 인쇄공이나 배달원보다 월급이 적다.
그래서 아우성이다. 『그것은 마치 운동장 수위가 「스타」선수보다 보수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쇄노조는 그들대로 『노동량을 보라』며 자신들의 임금수준이 높은 게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직종별 보수에 대한 전통적인 합의가 붕괴된 속에서 무리한 파업수단들이 경쟁적으로 심화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걸 보면서 영국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노사협조」가 영국과 같은 전철을 밟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장두성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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