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 불결한 꼬리|김덕<외국어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전후의 미국은 엄격한 의미에서 정상적 동맹관계를 가져보지 못했다. 미국의 그 동맹국에 대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일방적이었다는 점에서 파행적이었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미국은 우방을 대등한 동맹국으로 대우하는 일에는 전혀 익숙해져 있지 못한 것이다. 전후세계질서의 특이한 양상이 미국의 그러한 외교적 행태를 조장해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상황은 변했고 이 변화는 미국의 그 동맹국에 대한 외교적 행태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상황변화에 따른 미국의 대외적 역할의 재평가나 재조정이 비교적 신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할변화에 따라야할 외교행태의 변화는 다소 지연되고 있는 느낌이다. 바로 이러한 지연이 미국의 대 동맹국관계에서 「쇼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을 근년에 들어와 가끔 볼 수 있었다.
한미관계에서 지금 계속되고있는 진통도 바로 그런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박동선사건의 시비를 다시 끄집어 낼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다시 생각하기 조차 싫은 쓰라린 상처다. 이제 문제는 그 사건의 원만한 마무리이며 불편한 잡음의 해소를 통한 한미 관계의 정상화다.
그러나 박동선 사건이 한미양국의 이성 있는 협조로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이즈음 김동조씨 증언문제를 둘러싼 말썽이 새로운 우려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다.
여기에서 가장 크게 문제되고 있는 것은 미국의회가 통상적인 외교적 양식과 관례를 벗어난 파격적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끈질긴 미련을 고집하고 있는데 있다.
박동선씨 증언 문제에 대한 우리측의 적극적 협조로 이미 미국에 대한 우방으로서의 성실성을 그대로 보여준 한국에 대해서 외교관례를 무시해 가면서까지 미 의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김씨 증언문제를 기어이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면 이것은 분명히 국제적 관례와 예양을 존중해온 민주대국의 위신과 명예로운 전통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자비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미국의 위신과 명예는 제쳐놓고라도 미 국회의원2명이 박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일거에 타결하겠다는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실질적 방식이 못된다.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외교적 파격임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주권 국가적 위신을 대표하는 국가원수에게 스스로 그 위신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무모한 정치적 시도다. 그러한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쾌한 조롱일수도 있다.
더구나 미국언론의 일각에서 미국의 의사관철을 위해 한국에 대한 압력행사를 권유하고 있는 작금의 한심한 형편에서는 더욱 그렇다. 행여 미국의회의 이러한 시도가 중문선거를 앞둔 비천한 득표 극으로 세계의 이목 앞에 비쳐 진다면 슬픈 일이다.
한미간의 언짢은 잡음은 이제 조용히 끝맺어야 할 때다. 미국은 그 스스로의 위신을 훼손시키고 문제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비정상적이고도 반 관례적인 방식에 대한 고집을 한시 바삐 버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대한장비이양 안의 통과와 김동조씨 증언 협조문제에 관한 미 의회의 요구관철을 맞바꾸려는 옹색한 전술을 버려야한다.
어디까지나 한국「로비·스캔들」과 미국의 이익이 걸린 한국안보의 문제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미국은 전후시대의 증언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미관계를 이상 더 전후 시대적, 자기중심적인 동맹 관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그 외교의 가장 큰 역점을 긴밀한 한미동맹관계의 유지에 두고있으며 김씨 증언문제에 있어서도 정상외교경로를 통한 타결모색에 충분한 신축성과 성의를 갖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소부욕 물시어인』이라는 중국의 경구가 있다. 미국은 새로운 대 동맹국관계의 정립을 위해 이 경구를 한번쯤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