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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반대자의 애국심도 활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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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논설주간

2010년 8월 3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라크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많은 사람이 미국을 피폐하게 만든 ‘부시의 전쟁’을 성토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 “나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쟁에 대해 처음부터 견해가 달랐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 군에 대한 그의 지원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안보에 대한 헌신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연설은 이어졌다. “이라크전을 지지했던 애국자들이 있고, 이를 반대했던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략) 하나가 됐습니다.” 18분간의 연설이 미국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대한민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 투표일인 오늘 “박근혜를 지키자”와 “박근혜를 심판하자”는 극단의 목소리가 요란하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면 오직 승패에만 명운을 건 정치 세력들은 밤이 새도록 증오의 언사를 토해낼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 소재도 덩달아 춤을 출 것이다.

 우리에게도 분열을 통합으로 바꾸는 ‘신(神)의 한 수’가 필요하다. 오바마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저의 국정 운영을 지지했던 애국자도 있고 반대했던 애국자도 있습니다. 이제 선거는 끝났습니다. 이 순간부터 저는 모든 애국자와 하나가 되겠습니다.” 박 대통령도 똑같이 말할 수는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여섯 번 사과했고, 눈물까지 흘린 대통령이다. 문제는 단순한 수사(修辭)를 넘어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비로소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행동에서 나온다. 오바마가 이걸 보여주었다. 당선되자 이라크전을 주도한 부시 행정부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유임했다. 공화당의 지지를 받았던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를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 “공화당원은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나는 출처가 어디가 됐든 좋은 아이디어를 훔치는 걸 더할 수 없이 좋아한다”고 했던 조크를 현실로 만들었다. 집권 2기의 첫 국방부 장관도 공화당원인 척 헤이글 전 상원의원이었다. 부시 정부 법무부 부장관이었던 공화당원 제임스 코미는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발탁됐다.

 경선 과정에서 죽기 살기로 싸웠던 힐러리 클린턴은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언제든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독대권과 국무부 인사권 요구도 화끈하게 받아들였다. 힐러리는 오바마의 실질적 2인자가 됐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연설이 통합과 단결의 힘을 발휘하는 건 이렇게 초당적인 국정운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분열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이다. 총리를 포함한 내각을 실력 위주로 구성하고 과감하게 권한을 위임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경쟁자와 야권 인사도 활용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여준 리더십으론 한계가 있다. 대통령은 PK와 법조인이 요직을 싹쓸이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예 ‘PK+법조인’인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후보자로 지명했다. ‘5개월 16억원’의 전관예우 의혹도 거르지 못했다. 대통령 스스로가 관피아 척결을 국가개조의 핵심으로 제시한 직후의 일이었다. 오죽하면 강창희 국회의장이 “군사정권에서도 지역 안배는 했는데…”라고 혀를 찼을까.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무서운 사람이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기존 방식은 오바마의 초당적 국정운영과 이렇게 다르다.

 대통령은 총리감으로 “국가개혁의 적임자로 국민께서 요구하고 있는 분”을 찾는다고 한다. 국민이 원하는 총리는 대통령과 생각이 다른 사람일 수 있다. 새벽까지 보고서와 씨름하는 대통령이 놓치는 현실의 처절함을 아는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의 주심은 경기를 지배하는 총사령관이다. 하지만 오프사이드 반칙은 선심에게 맡긴다. 더 잘나서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국정운영도 이런 역할분담의 순리를 따라야 국민이 편안해진다.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돼 있다.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주인의 뜻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야당 시절인 2004년 7월 발언을 다시 한번 소개한다. “개발시대 (중략) 리더십과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고 냉전시대가 끝난 21세기 정보화시대의 리더십은 다르다. 정부가 다 이끌어가려고 하면 경제와 사회 발전에 해가 된다.” 눈 밝았던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다.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반대자의 애국심도 활용해야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순 없다. 남이 바뀌지 않으면 먼저 나를 바꿔 그들이 품 안에 들어오도록 하면 된다. 그게 지면서 이기는 길이다. 작은 전투를 내주고 큰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