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본 문학의 「상업주의」-김주영<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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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문단엔 이른바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이 나라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려는 양심적인 반작용임에 틀림없다. 또 문학의 순수성이나 고전성이 문학인에 의해서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염려스런 증상임에도 틀림없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의 「상업주의」의 정체를 극명하게 밝혀주지 못한 채 불성실한 작가를 매도하는 철퇴로써 남발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전적인 해답만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명료한 진단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문학행위 그 자체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은 때로 선동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술행위란 그 작가의 요구하는 바와는 관계없이 어차피 사회적 보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보상의 길이 단순히 재화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바보스러움이 「상업주의」인가. 그렇다면 문학활동이 재화의 문제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문단 초기에는 「상업주의」란 인식을 부여받을 작품이 없다고 원칙적으로 부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일부 작가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표면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그들이「상업주의」에 침식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보다 치열한 작가적 양심에 바탕한 투쟁 없이 대중의 감수성이나 말초적 기호추세에 안일하게 의존하고 있는 작품을 두고 「상업주의」라고 하는가. 남녀의 정사장면이 절제 없이 계속되고, 정조 관념이 불투명한 여자가 방황하는 이야기는 대중에 영합하는 것이고, 일테면 현실고발의 문제를 다룬 소설은 철저하게 순수의 편에 속해야하는가.
그러나 모든 소설은 근본적으로 대중을 위해 쓰여진다.
문제는 작품의 내용이기보다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작가의 정신적 자세가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에 있다.
투쟁의 의욕과 노력 없이 씌어진 작품, 창조적 동기 없이 씌어지고 있는 문학이 「상업주의적」문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녀의 정사장면이 빈번히 계속되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한 작품의 구성요건을 이루는 당위성을 지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령 『「채털리」부인의 사랑』같은 작품이 사회의 문학적 풍토를 오염시켰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상업주의란 작품을 만들거나 거기에 임하고 있는 작가의 제작태도에 보다 역점을 두어 재단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부의 축적만을 일삼고 있는 이 산업 사회의 대중이 은밀히 바라고 있는 오락근성에 반성 없이 영합해서 우리의 문학이 한낱 기호품 화나 오락의 도구로 전략될 적에 그때 겪어야할 가공할 좌절과 허무함의 문제는 엄청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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