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잊혀질 디지털 권리' 본격 논의할 때가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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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인터넷 공간에서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와 ‘기억될 권리’는 어떻게 얼마나 인정돼야 하나. 지난달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처음 잊힐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데 이어 지난주엔 대법원이 고인의 e메일 등 ‘디지털 유산(Digital heritage)’의 처리 방안 연구에 들어가면서 디지털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잊힐 권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개인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다. 세계적으로 찬반 논쟁이 뜨거운 이슈다. ECJ의 판결에 대해서도 “사생활 보호를 위한 판결”과 “개방·공유라는 인터넷 정신에 어긋나고 알 권리를 제한한다”는 의견이 맞선다. 정답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잊힐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는 의견이 늘고 있다. 갈수록 무차별 개인 정보 공개의 부작용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웬만한 개인 정보는 모두 모을 수 있다. 이런 정보들이 마녀사냥 식 신상 털기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글·사진 하나 때문에 승진·취업에서 불이익을 받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례도 빈번하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무한 복제되는 개인 정보를 모두 삭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비용·시간이 많이 든다. 누가 비용을 낼지부터 정해야 한다. 삭제 대상 정보·게시물의 범위와 종류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헌법상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문기사나 수사·의료 기록 같은 공공성이 높은 데이터는 삭제 요건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디지털 유산으로 불리는 ‘기억될 권리’는 고인의 e메일이나 홈페이지, 게임 머니 등에 유족들이 접근해 상속재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미국은 2004년 이라크에 파병됐다 전사한 한 병사의 사건을 계기로 유족들이 계정을 열어볼 수 있게 했다. 우리도 2010년 천안함 유족들이 고인의 홈페이지 접근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다. 국내엔 아직 디지털 유산에 대한 법안이나 판례가 확립돼 있지 않다. 신중한 논의를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