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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목은에게 茶의 의미는 이상향 찾는 내비게이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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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호 26면

승려들이 차를 즐기는 광경을 그린 오백나한도. 붉은 비단에 차 가루를 넣어 우려내는 탕법을 이용하고 있다. [일본 교토국립박물관]

봄날 깊은 계곡을 찾아드니 (산수를 그린) 그림도 이만은 못하리
(春入溪山畵不如)
가벼운 천둥이 밤새 적막을 진동시켰네
(輕雷一夜動潛虛)
아침을 먹은 후, 꽃자기 잔엔 흰 빛이 뜨고
(花瓷雪色朝飡後)
낮잠을 깬 뒤 돌솥엔 솔바람 소리 일어나네
(石銚松聲午睡餘)
달을 보니 완연히 그대 얼굴 본 듯하고
(弄月宛然親面見)
바람을 타니 창생을 소생시킬지 묻고 싶네
(乘風欲問到頭蘇)
누가 (세속의) 욕심을 잊은 늙은이인가
(鬢絲誰是忘機者)
흉중의 수많은 글을 깨끗이 씻은 이로다
(淨洗胸中書五車)
『목은시고(牧隱詩稿)』 권6

<7> 목은 이색

이색의 초상화

고려 말 문신이며 다인(茶人)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남긴 다시(茶詩) ‘전다즉사(煎茶卽事)’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함께 ‘3은’으로 유명한 이색은 여말선초(麗末鮮初) 격변기를 살면서 차를 통해 속진을 벗어나려 했다.

이색은 분명 깊은 산중의 계곡을 찾았던가 보다. 솜씨 좋은 화가가 그린 산수화보다 계산(溪山)이 더 아름답다 하였다. 그는 아침밥을 먹은 뒤, 혹은 오수를 즐기다 막 깨었을 때 차를 즐겼다. 물론 사원을 방문하여 승려를 만났을 때, 혹은 눈이 내리는 날도 차를 마셨을 게다.

이 시는 14세기 사대부들의 음다(飮茶) 풍속을 짐작케 한다. 당시 이들은 어떤 다완으로 차를 마셨을까. 유행했던 찻잔은 청자 다완과 백자 다완, 혹은 흑유 다완이었다. 하지만 이색은 꽃무늬가 있는 다완을 사용했다. 아마도 이 찻잔은 국화나 연꽃, 인당초 무늬를 상감이나 양각, 혹은 음각 기법으로 장식한 다완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가 즐긴 차는 백차(白茶)였으니 상감으로 장식한 ‘꽃자기 잔’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특히 ‘흰 빛(雪色)’이란 백설이나 백운처럼 희디흰 차색을 말한다. 바로 다말(茶沫·차 거품)의 색깔을 이리 표현한 것이다.

“돌솥엔 솔바람 소리 들려오네”라고 한 것은 찻물이 끓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물 끓는 소리를 송풍(松風)으로 상징한 것은 남송의 시인 나대경의 ‘약탕시(瀹湯詩)’에 “물 끓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죽로에서 급히 들어냄이라(松風檜雨到來初 急引銅甁移竹爐)”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찻물이 끓는 소리를 “소나무 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松風)”로 표현했다. 이는 차의 일미(一味)세계를 상징한 것으로, 다시(茶詩)의 대미(對美)를 드러낸 명구(名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차를 즐겼을까. 예부터 사람들은 신선처럼 오래 살기 위한 차를 찾았다. 첫째는 양생(養生)을 목적으로 차를 마셨고, 둘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색이 차를 즐긴 연유는 자명해진다. 바로 “바람을 타니 창생을 소생시킬지 묻고 싶다”는 것이 그것이다. “바람을 타다”라는 것은 차를 마신 후 몸의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가벼워진 몸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차를 마시면 신선이 된다는 그의 의지는 설득력을 가졌다. 진정 차는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는 명약(名藥)인가. 아니면 단순한 음료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좋은 차가 문무화(文武火·센 불과 약한 불)로 잘 끓여진 탕수(湯水)와 어우러져 다신(茶神)을 드러낸다면 명약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음료수에 불과할 뿐이다. 이색의 ‘봉산십이영(鳳山十二詠)’ 중 영천(靈泉)은 물의 중요성을 노래한 것이다.

학이 쪼아 맑은 샘물이 솟아나니(鶴啄淸泉出)
서늘한 기운이 폐부까지 닿고(冷然照肺腑)
마시면 신선의 몸으로 바뀐 듯(飮之骨欲仙)
사람에게 현포(玄圃:곤륜산의 선경)를 상상케 하네(令人想玄圃)
어찌 시 짓는 마음만 씻으랴(豈惟洗詩脾)
죽을병도 물리칠 수 있으리(可以却二豎)
평소 청정한 일 좋아하노니(平生愛淸事)
다보의 속편을 내고 싶네(有意續茶譜)
의당 돌솥은 가지고 가서(當携石鼎去)
소나무 끝에 비 뿌리는 걸 보리라(松梢看飛雨)
『牧隱詩稿』 권3

영천(靈泉)은 신령한 물이다. 신령한 물은 다신(茶神)을 드러낼 수 있다. 학이 쪼아 솟은 물은 맑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물을 먹으면 골수까지 변하여 이미 선경에 든 사람이다. 더구나 이 물은 시를 짓는 사람의 마음만 청정하게 씻어 주는 물이 아니라 죽을병도 고칠 수 있는 물이란다. 특히 물의 중요성을 알았던 그였으니 서둘러 물을 끓여 차의 오묘한 세계를 맛보려 하였다. 실제 그가 이런 차를 마시고 신선의 경지에 도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차를 통해 이상향에 머물기를 기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차는 맑고 깨끗한 이상향으로 향하는 이들의 길잡이였다. 속세의 여진은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다. 차는 긍정적인 힘을 가졌다. 그래서 이들은 속진에 살면서도 차를 통해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래로 차를 즐긴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도 선경의 어디쯤에서 송풍(松風) 소리를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몽주와 함께 주자학(성리학)을 흥성시킨 이색은 이 밖에도 수편의 다시를 남겨 차를 즐긴 여유와 즐거움을 노래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차를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말 화려하고 사치한 왕실의 차 문화는 극단적인 폐단을 드러냈고 사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왕실의 권위를 상실하여 공신과 승려,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차를 하사하던 왕실의 전통은 인종 3년(1125) 이후에 사라진다. “이자현이 죽었다…(이자현이) 병이 들자 왕이 내의를 보내 문병하고, 차와 약을 하사했다(仁宗乙巳三年 淸平山人(삭제할 것) 李資玄卒,...及有疾 王遣內醫問疾 賜茶藥)”는 『고려사절요』 기록 이후 왕실에서 차를 하사한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이미 13세기에 이르면 차가 보편화되어 귀한 물품으로서의 상징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닐까.

이색이 살았던 당시 고려는 원(元)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고 끝없는 내정 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는 원의 관료가 됐던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가 국자감에서 유학했다. 그곳에서 원의 차 문화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원은 풍성한 경제력을 토대로 원대의 독특한 차 문화를 이룩했다. 주로 단차(團茶)를 마셨다. 차를 달이는 방법은 다선(茶筅·차를 물에 잘 풀리도록 젓는 기구)을 이용하거나 긴 젓가락을 이용하여 다말(茶沫)을 내는 점다법(點茶法)이 유행했다. 간혹 선종의 사찰에서는 붉은 비단 속에 가루차를 넣은 후 비단에 싼 차를 다완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면서 다말을 내는 탕법(湯法)이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탕법은 송에서 유행되었던 것으로, 다선이 사용되기 전에 응용된 점다(點茶)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4세기엔 이미 다선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이색은 다선을 이용한 점다법으로 백차(白茶)를 즐겼을 것이다.

『고려사 열전』 이색조

평생 차를 사랑했던 이색은 정몽주와 함께 주자학 발전과 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주자학은 당시 불교나 유학이 사장(詞章), 훈고(訓詁)학 중심으로 흘러 불만이 컸던 신진 사대부들을 매료시켰다. 부자간의 효와 군신의 의를 강조하는 실천윤리를 중시하고 이기(理氣)적 세계관을 탐구하는 주자학은 신진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새롭고도 획기적인 학문 세계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색에 대해 “지조와 절개가 굳세지 못하여 국정에 대한 원대한 의견을 내놓은 것이 없다”고 박하게 평한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남긴 상소문엔 나라를 위한 그의 충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이색은 사후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목은집(牧隱集)』을 남겼다.



주자학
주희(朱熹·1130~1200)가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유학이라고도 부른다. 주희에 앞서 북송의 장재(張載·1020~1077)와 주돈이(周敦颐·1017~1073)는 화엄교의(華嚴敎義)의 이론체계인 이(理·본체)와 사(事·현상)가 서로 상응하는 상즉(相卽)의 이치로 설명되는 법계관(法界觀)에 주목한다. 이들은 이사(理事)의 상즉(相卽) 원리에 자극을 받아 태극·기·음양 등 전통적인 존재론을 기초로 이기론(理氣論)적 세계관을 탐구하여 신유학의 논리체계를 만들었다. 주자학을 고려에 처음 소개한 것은 안향(安珦·1243~1306)이었다. 원에서 주자학을 배워 왔던 백이정(白颐正)과 그의 제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고려에 전파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고 제한적이었다. 이색과 정몽주에 의해 14세기 중후기 널리 퍼졌다. 주자학의 전파는 불교를 배척하려는 기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기백은 『한국사신론』에서 “처음 이제현과 이색은 아직 불교 자체를 배격하기보다는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고 했다. 정도전(1342~1398)은 불교 자체를 멸륜해국(滅倫害國·윤리와 나라를 해침)의 도라 하여 강하게 배척했다. 결과적으로 주자학의 전파가 불교를 배척하려는 기류를 만들었다는 설은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여말선초 주자가례에 의해 가묘(家廟)를 세우고 상장제례(喪葬祭禮)에서 불교의 의식을 폐지하는 등 일련의 풍속 변화는 주자학의 대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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