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지를 통해본 문단사사 40년대 「문장」지 주장-제58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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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25사변을 계기로 많은 문화인들이 북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북으로 넘어간 문화인들 중에는 생리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여러 사람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 중에는 공산도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넘어간 사람도 있었고, 어쩌다가 골수분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관계로 이렁저렁하다가 끌려간 사람도 있었고, 혹은 감투를 씌워주는 바람에 일시적인 이욕에 눈이 어두워 넘어간 사람도 있었고, 혹은 서울이 공산천하가 되었을 때 죽지 않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부역을 했던 죄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싫어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문단인으로는 이태준·박태원·김영석 등과 화가 정현웅 같은 사람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었는가 싶고, 사정은 약간 다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벽초 홍명희도 그런 유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우선 이태준의 경우를 살펴보자. 문단에 나온 이듬해인 38년께에 나는 성북동에 있는 그의 자택에 두어 차례 놀러갔던 일이 있었다. 그는 「상심누」라는 초가집에 살면서도 골동품을 애호하고 화초 가꾸기를 즐겨하는 등 여간 귀족적인 성품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더듬어 보더라도 초기의 작품인『오몽녀』와 후기의 작품인 『꽃 나무를 심어 놓고』『복덕방』『까마귀』『영월영감』『돌다리』등과, 신문에 연재한 장편 『화관』『청춘무성』『월야의 사상』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작품을 어떻게 두드려 보아도 민족적인 냄새만이 농후하게 풍길 뿐이었지, 좌익적인 냄새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 그뿐이랴. 33년에는 이효석 정지용 조용만 김기림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조직하여서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경향문학을 반대하는 활동조차 전개해 왔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격은 그가 운영해오던 「문장」지의 편집에도 농후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한 이태준이 해방 후에 어떻게 그토록 쉽게 좌익으로 돌아버린 것일까. 거기에는 어떤 여성과의 관계가 있었다는 풍설도 한때 떠돈 일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실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더러 말하라면 이태준이 그처럼 급선회를 하게 된 데는 임화와 김남천의 배후조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믿는다.
8·15해방 사흘후인 8월18일에 내가 중앙문화건설협의회에서 김동인과 함께 이태준을 만났던 것은 이미 말한바 있거니와, 그로부터 5,6일 후에 나는 최영수를 만나려고 연희장 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갯길에서 이태준을 우연히 만난 일이 있었다. 더위가 30도를 넘는 몹시 뜨거운 날이어서 이태준과 나는 연희장 고개마루턱「아카시아」나무 그늘에서 참외를 사먹으며 3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이태준은 『나는 공산주의에는 아무 흥미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후에 내가 계용묵과 함께 「대조」라는 종합잡지를 발간 할 때 창간호에 『벽초 선생을 둘러싸고』라는 문학좌담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이태준은 함께 참석했던 김기림. 이원조 등과 사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공산주의에는 흥미가 없노라고 분명하게 말했었다.
그는 개인적인 취미로 보나 문학적인 체취로 보나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순수문학을 신봉해온 그에게는 좌익작가가 될 요소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임화 김남천 등과 어울려 돌아가다가 결국 월북까지 해버린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을 이태준은 명리에 밝고 출세욕이 많았고 처세술이 지나치게 약았던 때문이었다고 판단하고 싶다. 임화와 김남천은 해방직후 문화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중앙문화건설협의회라는 문화단체를 조직하면서 문증적인 명성이 높았던 이태준에게 대뜸 부위원장이라는 큼직한 감투를 씌워주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이태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이었건만 이태준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건국초기의 문화계에 군림을 해보고 싶은 명예욕에서 결국은 공산세계에 끌려 들어가 버린 것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싶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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