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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택 기자의 '불효일기' <18화> 아버지의 중절모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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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화려한 원색 계열의 옷을 많이 입는다는데, 유독 아버지에게는 예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거의 한 가지 패션을 고집한다. 바지는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가 대부분이다. 처음에는 바지 한 개로 계속 입나 싶었는데, 검은색 트레이닝복이 여러 벌이 있다. 신발은 운동화. 내복과 스웨터를 입고, 겉에는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는 식이다. 티셔츠만 매일 바뀐다. 주로 터틀넥 티셔츠를 입는다.

물론 길에서 아버지를 찾기는 편하다. 비쩍 마른 아저씨가 위아래 검은 체육복을 입고 청색 모자를 쓰면 딱 아버지다. 예외도 있긴 했다. 내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를 할 때에는 코트에 양복, 넥타이를 하고 왔다. 결혼식 당일에도 비슷한 복장. 그 외에는 주구장창 트레이닝복이다.

이유는 ‘기능성’에 있었다. 아버지에게 고무줄 바지는 중요한 의미다. 빨리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암환자는 다양한 설사 가능성에 직면한다. 언제 어디서든 설사가 급하면 얼른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봐야 한다. 용변이 급한데 벨트를 풀거나, 한가하게 바지를 정리하면서 내릴 수 없다. 이 때문에 물론 버스 같은 곳에서는 실례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말이다.

최근 암병동에서도 아버지는 고무줄바지를 찾았다. 병원에서는 암환자가 많은 구관 병동에 고무줄 바지를 비치했었다. 자주 바지를 벗거나 용변 때문에 고생을 하는 노인 암환자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병원이 새 건물로 이전하고, 환자복도 새 것으로 바꾸면서 고무줄 바지가 이제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옆에 같이 입원 수속을 하던 아저씨들조차 아쉬워했을 정도다.

하의 뿐 아니라 상의도 ‘입고 벗기 편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입원 한 번을 해도 검사만 10가지에 달하고, 통원 한 번을 해도 방사선 치료 때문에 옷을 모조리 벗어야 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조금이라도 덜 밍그적거려야 삶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가 오늘은 중절모를 쓰고 왔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를 만나러 잠시 하차하는 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려입고 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커피숍에서 만나자마자 아버지에게 웬 중절모냐고 물었다. 대부분 야구모자를 쓰던 것을 감안하면, 꽤 의미있는 변화다. 또한 평소에 대화 주제가 치료, 건강, 식사 등 암과 관련된 모든 것이었다는 점에 비하면, 모자 하나 바뀐 것은 우리가 꽤 길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중절모 쓰기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번 불효일기에서도 말했던, 아버지 친구분의 아들 결혼식에 갈 패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단다. 이유는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양복을 입어야겠는데, 중후한 아버지 친구 느낌을 살리려고 이 모자 저 모자를 써보다가 중절모를 택했을 것이다.

“결혼식은 신랑 신부만 돋보이면 되는 것이지 무슨 하객, 그것도 신랑 아버지의 친구가 무슨 패션이란 말입니까”라고 말을 할까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친구 아들 결혼식에 폼이 나지 않아, 자칫 혼주인 친구에게 누를 끼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의 고민은 중절모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방법이다. 아버지는 머리가 작다. 대두인 아들과는 딴판이다. 게다가 항암치료로 살이 빠지고 탈모가 가속화되면서, 머리가 더 작아졌다. 이 때문에 평범한 모자를 써도 흘러내리기 일쑤다. 야구 모자를 쓸 때는 이 때문에 항상 위로 향하게 썼다. 약간 흘러내릴 것을 감안한 것이다. 또한 야구 모자는 단추나 끈이 있는 것을 사면 사이즈 조절도 가능하다.

야구 모자는 좀 줄여서 쓰면 되지만, 중절모의 경우에는 그것이 쉽지 않다. 고급 의상실에서 산다면야 맞춰서 구매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모자는 생활용품점에서 구입한 3000원짜리라고 한다.

아버지는 과일상자에 쓰이는 골판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골판지를 작게 잘라, 모자 속에 슬쩍 넣으면 ‘머리 뽕’처럼 되어 모자가 딱 맞고 폼이 난다는 것이다. 골판지를 가로 15cm, 세로 4cm 정도로 잘라, 머리띠처럼 이마에 붙이고 모자를 쓰면 딱 폼이 산다고 했다.

지난번 장인어른 생신 때에는 분홍색 피케 셔츠를 사드렸는데, 어버이날에는 아버지께 중절모에 어울리는 셔츠라도 하나 해드려야겠다. 그러면 또 아들이 사준 것이라고 일주일 동안 그 셔츠만 입으시겠지.

◇가글ㆍ마스크ㆍ지팡이ㆍ휴지 ‘외출 4종 세트’=암환자의 외출은 필요하지만 늘 조심스럽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암환자는 반드시 마스크를 지참하고 외출해야 한다. 언제 콧물이 흘러내릴지 모르고, 미세먼지가 환자의 기관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폐렴이 생길 수도 있다. 휴지는 콧물과 가래를 위함이다.

가글액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마치 입원을 하면 영양제를 처방해 줄 수 있느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듯, 환자들은 퇴원할 때 가글액을 꼭 챙긴다. 언제 벗겨질지 모르는 예민한 입 상태 때문이다. 암환자는 면역력이 떨어져 온 몸이 예민하다. 입 안 역시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항암제 부작용으로 입안의 피부가 벗겨지기 쉽다. 때문에 처방된 ‘녹색 가글액(탄튬)’으로 하루에 몇 차례씩 가글을 해야 한다.

하루 종일 가글을 하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게을리 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올 수도 있다. 한 번은 아버지가 가글을 귀찮다고 안 했다가 입천장이 벗겨져 1주일을 고생했던 적도 있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매운탕을 먹자고 했는데, 입천장이 자신의 과실로 벗겨진 것을 말도 못하고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암환자에게 1주일간 식사에 장애가 온다는 것은 심각한 상태로 번질 수도 있다. 몸무게가 43㎏ 정도로 빠져버린 아버지는 식사를 며칠만 못 해도 기력이 빠질 것이다. 이 때문에 가글은 생존의 문제다. 아버지는 그 이후 싫어도 무조건 하루에 3~5차례 가글액으로 입 안을 행군다.

지팡이는 걸음을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이다. 산책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계속한다. 걷다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싶을 때 지팡이를 들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역정 낼 때 지팡이를 들면 어릴 적 TV에서 보던 역정내는 할아버지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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