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좋은 위로에 대한 오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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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호 22면

세월호 침몰 사건이 장기화되고 있다. 아직도 찾지 못한 실종자가 있고, 사망을 확인한 가족들은 비통에 잠겨 있다. 워낙 큰 사건이라 한두 다리 건너면 주변에 관련된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누구나 관성에 따라 습관처럼 하는 위로의 말들이 있지만 이번 사건만큼 큰 아픔을 경험한 경우엔 그 위로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대통령의 위로와 사과담화도 썩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보니, 좋은 위로에 대한 고민은 더욱 커진다.

좋은 뜻으로 성의껏 위로를 하지만 듣는 사람이 “아, 네. 감사합니다”라고 할 뿐 표정을 보면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할 때가 있다.

우리는 “내가 다 들어줄게. 세세하게 다 얘기해”라는 위로의 말을 흔히 건넨다. 잘 들어주는 것은 좋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사람에게 힘든 사건을 자세하게 얘기하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자칫 호기심으로 비춰질 수 있다. 외상 기억을 초기에 다시 떠올려 말하는 것을 디브리핑(debriefing)이라 하는데,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일러스트 강일구

두 번째,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봤는데, 결국은 나아졌다”는 위로다. 공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자기 경험을 말하는 것은 언뜻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당신은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을 극복할 정도로 강하고, 나는 마음의 힘이 약해서 이렇게 힘들어한다고?”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지금 어떤 느낌인지 제가 잘 알아요”라는 말이다.

세 번째, “가족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목숨을 건진 것이 정말 다행이네요”라는 위로다.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부정적 생각에도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다. 그러나 충분히 슬퍼하며 애도를 하는 것만도 버거운 이에게 현실적 균형감각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네 번째는 위로하는 사람이 더 흥분해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등 강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는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전달되지만 이런 방식은 상처받은 당사자가 위로하는 이의 감정에 짓눌려서 막상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빼앗겨버렸다고 여길 위험이 있다.

이들 모두 선한 의도이고, 한두 번은 해본 위로의 말들이다. 그렇지만 도리어 상처를 깊게 할 위험이 있다. 좋은 말로 위로를 한다고 해서 모두 선(善)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는 것이다. 상대가 얘기할 준비가 될 때까지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옆에서 기다려준다. 그들 곁에서 조용히 머물다 말을 시작하면 그때 충분한 시간을 내어 그저 듣는 것이다. 내 감정을 보이기보다 상대가 지금 표현하는 감정을 조건 없이 존중하면서 받아들인다. 고개를 끄덕여주고 적절히 눈을 마주치며 필요하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은 위로는 상대가 감탄할 만한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고립감과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결국 홀로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을 공감하며 바로 옆에서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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