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우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독일작가 「토마스·만」의 소설『부덴브로크스가』는 4대에 걸친 어느 가문의 형낙을 다룬 명작이다.
초대「요한」은 감성이 무딘 사람으로 돈만을 추구한다. 그의 아들 「요한」 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가업의 번영과 가명의 융성에 만족치 못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탐한다.
3대에 이르러 기어이 정치적인 지위를 휙득한다. 그러나 이3대는 벌써 선대와는 상당히 다른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돈과 지위」 위에서 그는 선대들이 상상도 하지못했던 어떤 공복감을 느낀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옴이 고픈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의 세계에는 예술과 인간성의 새로운 경지가 있음을 알게된다. 「쇼펜하워」의 철학서도 그에겐 더없이 깊은 감명올 준다.
「토마스·만」의 이 장편소설은 바로 3대의「토마스」를 주원하는 것이다.
동양의 고전에드 『의식이 족하면 예절을 안다』(관자)는 말이 있다. 「부덴브로크스가」의 성쇠나 관자의 교훈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를 준다.
최근 전경련과 어느 학회는 공동으로 우리나라의 90년대를 내다보는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91년도의 GNP는 1인당 7,731「달러」, 무역은 1천1백억「달러」, 완전고용…. 그야말로 「풍요한 사회」를 예고하는 화려한 「팡파르」다.
그러나 이 요란한 「팡파르」의 뒤에서는 인간상실의 내일을 걱정하는 어두운 목소리도 있다. 그 무엇보다드 「인간적인 삶」을 갈구하는 옴성인 것이다.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성장보다는 인간적인 복지이고 GNP성장중심의 경제·사회정잭은 필연적으로 높두아지는 것이 될 수 없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도로가 편리하고, 주택이 안악하며, 전국의 수목이 울창할때 자동차의 증가는 비로소 의미를 갖게된다.
오늘의 선진산업국가들이 저마다 공해에의 비명을 지르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또한 이들 국가의 시민들은 그 풍요와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궁핍감에서 하루도 풀려나는 날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더 많은 돈과 더 화려한 사치와 더 과시하려는 물질적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맞이할 90년대는 「부덴브로크스」가의 3대가 되지않을지 오히려 우울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방향울 모색해야할 때인 것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