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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밖의 겨울>(3)-조일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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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수습사원A-….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무슨 짐승처럼 서서히 기어나가기 시작한다. 실장이 그런 모습을 외면한다. 외면하고 서 있는 실장에게 타이피스트가 재빨리 타자 된 중이를 내 민다. 실장이 그것을 받아들고 기어나가는 수습사원A의 마지막 모습을 한없이 지켜보고 있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네?
그리고 둘은 서로 노란다.
침묵.
그리고 둘은 비로소 서로의 눈 속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침묵.
그리고 둘은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부정한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나는 한번도 거역해보질 않았습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오늘밤입니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이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타이피스트-실장님. 허지만….
실장-(광적으로) 계속합시다!
타이피스트-허지만….
실장-(밖을 향해서) A-75!
타이피스트-….
실장-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B-77!
타이피스트-그보다는 프로메테우스 적인….
실장-그는 세속적 참여자에 불과합니다.
반역적 인간 구원을 시도한자! 이것이 그가 오늘 겪어야하는 비극의 전부입니다. C-78!
타이피스트-실장님!
(처음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수습사원들, 그들의 표정을 읽고 있는 실장의 안면에 광적인 웃음기가 스며들고, 이어 그 광적인 웃음기는 아예 어이없는 어릿광대의 그것으로, 그들을 장난처럼 맞이한다.)
실장-감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서 삼 개월의 수습기간이 단 세시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수습사원들-감사합니다.
실장-네. 여러분! 여러분이 하고싶어 하는 일과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멀리 분리되어 있는가는 꼭 시간의 소모와 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시계를 본다) 공 아홉 시 십분. (잠시)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갖고있는 여러분의 이름을 잃어버려야 할 시간입니다.
수습사원들-(각각 자기들의 시계를 돌려놓으며) 네.
실장-좋습니다. 그럼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수습사원C-네. C-77.
실장-좋습니다. 당신은?
수습사원B-B-76.
실장-당신은?
수습사원A-네. A-75.
실장-맞았습니다. 여러분, 말하자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갖고있는 모든 것을 여러분의 신뢰로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수습사원C-과거의 작용, 즉 구부러졌던 못은 나의 호주머니 속에서부터 버려야한다. 맞습니까?
실장-(웃으며) 맞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못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수습사원B-새로운 시작.
실장-네.
수습사원A-새로운 시작.
실장-네.
수습사원B-새로운 출발!
실장-네.
(동시에 유쾌히 웃어대는 수습사원들 한동안.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을 중단한다. 어릿광대의 시늉으로 그 웃음을 바라보고 있는 실장을 의식하며… 그러나 실장은 그들의 그런 웃음을 더욱 권유한다.)
실장-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 그런 순간들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타이피스트-실장님.
실장-(시계를 본다) 공아홉시 십오분.
수습사원들-공아홉시 십오분.
실장-네. 지금부터 우리, 우리들의 연령에 관해서 조금만 주의하고 넘어갑시다.
수습사원들-여러분은 지금 몇 살쯤이나 되셨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수습사원A-스물 일곱.
수습사원B-스물 아홉.
수습사원C-스물 다섯.
실장-정확하게 말씀드려 스물 다섯입니다. 스물 다섯.
수습사원A-네. 스물 다섯.
실장-스물 다섯.
수습사원B-네.
실장-스물 다섯.
수습사원C-네. 스물 다섯.
(수습사원들, 조금씩 다시 긴장한다.)
실장-몇 살입니까?
수습사원C-네. 스물 다섯.
실장-몇 살이죠?
수습사원B-네, 스물 다섯.
실장-몇 살이십니까?
수습사원A-네, 스물 다섯.
실장-좋습니다. 여러분, 그럼 스물 다섯 살 된 이 청년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수습사원A-아버지와 두 동생, 장남입니다.
실장-아이오.
수습사원B-시집 못간 내 누님과 어머니, 그리고 동생이 다섯.
실장-아이오.
수습사원C-전쟁 고아.
실장-아이오!
(사이)
실장-이 청년의 가족은 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한 마리의 개와 일몰 후 일출 전에만 볼 수 있는 가정부.
수습사원C-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실장-일몰 후 일출 전에만 볼 수 있는 가정부.
수습사원B-한 마리의 개.
실장-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수습사원A-일몰 후 일출 전에만 볼 수 있는 가정부.
실장-네.
수습사원C-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실장-네.
수습사원B-한 마리의 개.
실장-즉 여러분의 가족입니다. 그렇습니까?
수습사원A-네. 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실장-그렇습니까?
수습사원B-네. 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한 마리의 개.
실장-틀림없습니까?
수습사원C-네. 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 한 마리의 개와 일몰 후 일출 전에만 볼 수 있는 가정부!
(사이)
실장-이 청년의 취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승마·골프·낚시·등산·드라이브
수습사원A-제가요?
실장-네.
수습사원B-제 취미는 강아지를 키우는 일입니다.
실장-당신의 취미는?
수습사원C-사과는 맛있다.
실장-맛있는 건 빠나나.
수습사원C-빠나나는 길다.
실장-길면 기차.
수습사원C-기차는 빠르다.
실장-빠른 것은 비행기.
수습사원C-비행기는 높다.
실장-높은 것은 하늘!
(사이)
실장-당신의 취미는 승마·골프·낚시·등산·드라이브.
수습사원C-승마·골프·낚시·등산·드라이브.
실장-그런데 어떻게 골프채를 휘두렀을까?
(잠시 자기 고민에 잠긴다.)
타이피스트-물론 가능했습니다.
수습사원A-(그 시늉을 해 보인다.)
실장-아이오.
수습사원B-(그 시늉을 해 보인다.)
실장-아이오.
수습사원C-(그 시늉을 해 보인다.)
실장-아이오.
(그 시늉을 해 본다. 그러나 한발로 서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실장이 곧 넘어진다. 수습사원들, 갑자기 웃는다. 실장이 다시 일어나 휘두른다. 다시 넘어지고 수습사원들, 더욱 부담 없이 웃어댄다.
-그 몇 차례의 반복. 불안스런 표정의 타이피스트와는 대조적으로 더욱 더 부담 없이 웃어대는 수습사원들. 순간 그 자세의 정확도를 찾아낸 실장이 괴성처럼 소리지른다.)
실장-이거다!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따라 하십시오!
(수습사원들,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실장이 하고 있는 자세를 하려하나 자꾸 넘어진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또 넘어진다.)
실장-(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오만하게 웃어대는 실장)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십시오.
순간,
요란스럽게 울리는 전화벨.
모두들,
그렇게 정지되어 있다.
타이피스트-(수화기를 든다.)
네.… 네.… 네.
(수화기를 내려놓고 실장을 본다. 실장과 마주치는 시선. 실장이 그런 자세를 풀고 시계를 본다.)
(사이).
실장-스물 다섯 살 된 이 청년은 스물 네살 되는 생일날 드라이브를 하다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수습사원들-…?
실장-스물 다섯 살 된 이 청년은 스물 세 살 되는 생일날 승마를 즐기다 왼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수습사원들-…?
실장-스물 다섯 살 된 이 청년은 스물 다섯 번째 생일날 밤낚시를 즐겼습니다.
(사이)
실장-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이)
실장-따라나가시오. 당신의 육체가 당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 조용히, 조용히 따라나가시오.
(조용한, 참으로 조용한 타이피스트의 안내를 받으며 퇴장하는 수습사원들.
그 끝을 쫓는 한 주름의 냉기가 회오리처럼 돌아 실장의 안면을 감싼다)
실장-반역적 인간구원을 가져온 세속적 참여자, 프로메테우스! 나는 그대의 형벌을 찬양하네!…
(거센 바람소리. 침묵)
실장-아이오. 나는 절대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아이오. 절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순간,
절벽에 부딪는 비명 소리.
사이.
저항도 없이,
단지 육신의 고통 뿐으로
동물처럼 우짖는 수습사원들의 비명이 무대를 배회하고,
이제 실장의 안면에 서린 광기는 하나의 어이없는 어릿광대의 웃음으로 무슨 짐승처럼 설레설레 기어 들어오는 수습사원들을 맞이한다.)
실장-훌륭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그 성실과 인내에 탄복합니다.
수습사원들-아이오.
(절단된 한쪽 다리와 실명된 한쪽 눈을 한 그들이 오히려 실장을 위로하듯 그렇게 고개를 젓는다.)
실장-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선택된 여러분, 이제 그 보람을 찾았습니다. 자! 이제 말을 탑시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겁니다.
(광대 같은 시늉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실장.
그 한동안을 바라보고 있는 수습사원들.)
실장-어서 달립시다, 어서!
(그런 시늉을 따라하려는 수습사원들. 그러나 절단된 한쪽 다리와 실명된 한쪽 눈으로 그런 시늉이 불가능할 뿐, 이내 넘어져 뒹군다. 다시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실장, 넘어지는 그들, 일으켜 세우는 실장.
-이내 넘어지고
이내 일으켜 세우고
또 넘어지고
또 일으켜 세우고
·······.)
실장-낚시도 하고!
드라이브, 신나는 드라이브
골프를 합시다!
(시늉을 시늉하고
시늉을 시늉하다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고
또 넘어지고
또 일으켜 세우는
그 반복과
그 흥분과
그 소용돌이
그리고 실장의 안면을 점식해 오는 광기.)
실장-이제 우리는 완강한 식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마음껏 먹으면서 스스로를 터득합시다.
(타이피스트가 이미 무엇을 한아름 안고 들어와 그것을 허공에 뿌린다. 마치 동물원의 사육사가 그들에게 먹이를 공급하듯.
그러자 이번엔 그 먹이를 쫓고 뺏으며 분별없이 먹어대는 혼란으로
무대는 갑자기
우리들,
그 생존의 현장처럼
그 습기와,
그런 음모와,
그런 갈등으로 돌변하면,
느닷없는 노크 소리.
정적.
·······.
그 정적을 뚫는 또 한번의 무겁고 둔탁한 노크 소리.)
(사이)
실장-C-76!
(시계를 본다.)
수습사원C-네.
(사이)
실장-B-75!
수습사원B-네.
(사이)
실장-A-77!
수습사원A-네.
(사이)
실장-당신의 가족 관계를 말해보시오.
수습사원B-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운 어머니와. 한 마리의 개.…
수습사원C-엄격한 부친과 자애로우신 어머니와 한 마리의 개. 일몰 후 일출 전에만 볼 수 있는 가정부
수습사원A-….
실장-가정부와 개는 한방을 씁니다.
수습사원들-네.
타이피스트-실장님!
(사이)
실장-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
수습사원A-등산·낚시·드라이브.
수습사원B-등산·낚시·드라이브·승마.
수습사원C-등산·낚시·드라이브·승마·골프.
실장-오늘은 무엇으로 즐기시겠습니까?
(사이)
수습사원C-낚시.
수습사원B-드라이브.
수습사원A-승마.
실장-드라이브를 나간 김에 골프를 치고 밤낚시를 했습니다. 물론 가정부와 동행합니다.
(사이)
실장-스물 다섯 번째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사이)
수습사원A-고맙소.
(나간다)
실장-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공손히 인사한다)
수습사원B-고맙소.
(나간다)
실장-몸조심하십시오.
(공손히 인사한다)
수습사원C-고맙소.
(나간다)
실장-스물 다섯 번째 당신의 생일날 당신은 밤낚시를 하시다 익사하셨습니다.
(사이)
(실장과 타이피스트의 시선이 오랫동안 마주치고 있다.)
타이피스트-오늘밤부터는 강아지를 밖에서 재우세요.
(타이피스트, 총총히 퇴장한다. 그 뒤를 말없이 따르던 실장이 갑자기 객석을 향해 돌아서며 골프채를 힘껏 휘둘러본다. 그리곤 말 타는 시늉을 한다. 그리곤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달려본다. 그리곤 고기를 낚는다.
낚싯대가 휘청거리는 대어를 낚아 올리고 있다. 힘겹게 힘겹게.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조심스런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며….
또 한번의 조심스런 노크 소리.)
실장-누구요?
(아직도 대어를 끌어올리고 있다.)
실장-모두 떠났습니다.
(힘겹게, 힘겹게 대어를 낚아 올리고 있다.
·······.
또 한번의 조심스런 노크 소리.)
실장-모두들 떠났습니다. 그곳으로 가보시오. 거기 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다시 그런 노크 소리뿐.)
실장-해가 지면 그 여잔 여기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가정부라는 직업의 직장이 어디요?
(힘겹게, 힘겹게,
대어를 낚아 올리고 있다.
·······.
다시 그 조심스런 노크 소리.)
실장-허지만 그 여자도 오늘은 함께 떠났소. 거기도 없을 겁니다.
(더욱 더 힘겹게 낚싯대를 끌어올리는 시늉을 하고 있다. …다시 그 집요한 노크 소리는 마침내 실장의 낚싯대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실장-이거 보시오! 그 여자는 내 아내요! 내가 그걸 모르고 누가 알겠소!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수습사원A가 실장의 등뒤에 우뚝 서있다.)
(사이)
실장-당신, 거기 그렇게 서있는 이유… 이유가 뭐요?
(사이)
수습사원A-서있거나 앉아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
덕분에 여기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을 잊으셨더군요.
(한동안 침묵.
수습사원A가 실장의 어깨를 슬쩍 밀어버린다. 순간, 대어를 낚아 올리던 실장의 시늉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너지며, 천길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비명.
메아리처럼 사라지며 막이 내린다.) (끝) 【조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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