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의 대 박씨 소환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산너머 산이라 더니 박동선 사건이 바로 그 짝이다. 간신만고 끝에 한미양국 정부가 박씨의 도미 법정증언절차에 합의하자 이번에는 미 의회에서 반발이 일고 있다.
양국 정부간에 합의한 행정부의 조사와 법정증언만으로는 부족하고, 꼭 하원윤리위에서 증언을 들어야만 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를 행동으로라도 보이려는 듯 하원윤리위는 4일 박씨에 대한 소환장 발부사실을 공표했다.
이렇게 되면 박씨가 미국에 가는 이상 의회증언을 피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이왕 미국에 가는 바에야 법정증언과 의회증언을 구별할 까닭이 무엇이냐고 할는지 모르나, 사정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어차피 박동선 사건은 이미 정치문제화 되어있는 사건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사건을 법적으로 다루는 형사소송절차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다루는 의회조사는 정치성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도려낼 것은 도려내더라도 쓸데없이 상처를 헤집지 않고, 박 씨의 사건을 치유했으면 하는 우리의 처지로선 양국 정부가 합의한 선이 바람직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현 단계에서 우리로선 한국측은 할 수 있는 협조를 다 한 만큼 이제는 미국정부와 의회가 잘 타협해 보랄 수밖에는 없다.
한번 생각해 보자. 범죄인 인도협정이나 사법공조협정도 없는 사이에서 아무리 면책조건이라고는 하지만 자국민을 남의 나라에 보내는 일이 어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의 미국에 대한 특별한 우의가 없었다면 양측 정부간에 합의된 해결방법이 나오기 조차했을까. 이만하면 우리로선 최대의 성의를 다한 것이다.
이제 와서 딴소리가 나온다면 이는 전적으로 딴소리를 하는 쪽이 책임져야할 일이다.
그렇다고 감출 것이 있어 미 의회증언을 피하려 한다는 오해 일랑 미국인들이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된 미 법무성의 조사에 응하고, 법정에서 증언까지 하게된 마당에 무엇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우리로선 단지 이 사건이 이 이상 더 부적절하게 미국 내 정치에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 의회가 쉽사리 박씨를 증언대에 세우겠다는 고집을 누그러뜨릴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은 무관한데 오해를 받는 의원은 오해를 씻기 위해, 또 박씨의 도미로 입장이 곤란해질 의원은 도미자체를 막기 위해 의회증언을 고집하는 것 같다.
그밖에 여러 정치적 이유에서 의회조사를 주장하는 여론이 많아 좀처럼 후퇴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미 의회의 요구가 끝까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미 의회의 보복은 현재 계류중인 철군보완조치의 거부로 나타날는지 모른다.
한국의 안보와 박동선 사건은 별개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 생각 있는 미국사람들의 공통된 주장이지만, 의회의 반발이 커지다 보면 군중심리가 작용할 여지를 배제하긴 어렵다.
이렇게 될 경우, 국내문제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미국정부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주한미군철수계획 자체를 보류 또는 백지화해야 마땅하다.
선보완 없는 철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양국간의 합의 이전에 한반도의 안보상황의 기본요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미국 내대로, 한미간에는 한미간대로 서로 호양정신을 살려 이러한 막다른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우선되어야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