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조국|남북의 평행선 어디까지 갈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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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는 「앙드레·퐁텐」 「르·몽드」 주필의 방한기 ④를 『하나의 조국』이란 제목으로 20일 게재했다. 다음은 그 요지.
「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8월 북경을 방문, 등소평과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를 했었다.
「밴스」는 중공 지도자들에게 서울의 지도자들을 고려할 것을 열심히 설득했다.
중공의 제2인자는 40분 동안 한마디 대꾸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쳐들고 「밴스」에게 약간 슬픈 듯한 희미한 미소를 띄우면서 『물론이지요. 한반도는 통일될 것입니다. 아마 1백년 후 또는 1천년 후에나…』라고 말했다.
등소평의 이 말은 중공 정책의 기본 이념과 약간 상반된 것이다. 중공은 3차 대전이 다소나마 가까운 시기에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정치적 형태를 적어도 심각하게 수정시킬 굉장한 전투를 한 뒤, 「왜」 그리고 「어떻게」 한반도의 「현상」이 유지될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리고 만일 세계적이거나 지역적인 전쟁이 회피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 어느 쪽도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한 상대방에 의해 인정된 방법이 다른 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아들일 최소한의 경향도 느끼지 못한다.
한반도의 두 정부는 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깊은 심연에 의해 분리되고 있다.
동·서독 사이에는 「베를린」이란 장벽이 가로 놓여 있어도 최소한의 통로가 항상 열려 있다. 최악의 시기에 있어도 양독 국민들은 전화나 편지를 보낼 수 있으며 어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바캉스」 때 만날 수 있다. 서독의 대 동독 교역은 「유럽」인들이 동독을 EEC의 열번째 회원국이라고 말할 만큼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 수만명이 해마다 국경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간에는 72년에 시작된 대화가 3년간 짧게 진행됐을 뿐이며 정전위 회담과 납북적십자 회담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을 뿐 서로 말을 받아 욕설을 교환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수백만 한국인들은 북쪽에서 내려왔고 그 대부분이 6·25 때 왔다. 월남민들에게 최소한의 고향 방문도 북쪽에 의해 거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방법이던 간에 그들의 가족의 소식도 얻을 수 없다.
나는 『평양·개성·원산 또는 다른 곳에 형님·여동생·아저씨가 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지, 살고 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별로 희망이 없지만 소식을 알려주도록 노력하겠다고 제의 할 때 그들은 관련자들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걱정해 거절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의 비인간적 상황이다.
점령 시기의 「나치」는 상호 지역간 통행증 발급에 동의했었다. 평양 측이나 또는 서울 측에서 이와 유사한 하나와 제도를 채택하는 것이 잘못인지 모르겠다.
38선의 양쪽은 단순히 다른 두 개의 사회가 진행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많은 환상을 만들고 있다.
한국의 「매스·미디어」는 지난 30년간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해 왔다.
사회와 「이데올로기」면에 있어서 남북의 대조는 종교면 보다 덜 감동적이다. 북에서는 공개적으로 예배를 보는 장소가 단 한곳도 남아 있지 않다. 전쟁기간 동안 파괴된 성당 교회를 주민들이 재건 할 이유란 없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한국에는 교회 종 탑이 없는 마을이 한곳도 없다. 색칠된 지붕 가운데로 보이는 이국적인 종 탑들은 논과 야산과 함께 너무나 「아시아」적인 풍경이었다. 불교 신자들은 절에서 엎드려 절하거나 시주를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북한에서는 어린이들과 어른들에게 일본에 대한 「레지스탕스」 행동을 찬미하도록 가르친다.
기념물마다 김일성에 의해 지휘된 항일 「게릴라」의 업적이 찬양되고 있다.
남북에서는 북한보다 일본을 더욱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이 항일 「게릴라」에 관해 결코 말하지 않는다. 마치 「게릴라」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때때로 언급되는 유일한 저항 운동은 1919년의 3·1 독립운동이다.
남쪽 사람들은 옛날의 예절 규범의 문자들을 점점 적게 사용한다. 공산주의 나라 북한에서 바로 이것이 보존되고 있었던 것은 정말 역설적이다. 이것이 김일성에게 사용되는 최상급 형용으로 설명하는데 공헌한 것은 우리들을 웃게 한다.
김일성에게서는 지고한 왕권의 한 그림자를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보는 것 같다.
우리는 남한에서 몇번이나 우리가 북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질문 받았다. 모든 것이 더욱 악화돼 가고 절반쯤 죽어 가는 김일성이 그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나라가 전쟁상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희망 속에서 뿐만이 아니다.
평양·함흥·원산 등등 한국인들에게 닫혀진 도시를 내가 방문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또한 백두산의 모든 장관을 구경 할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의구심과 관심을 도처에서 받았다.
그러나 접대하는 태도는 똑같았고 또 역시 수많은 음식조차 같았다. 북한의 젓가락들이 「알루미늄」제이었는데 비해 남한에서는 특히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은수저가 보다 자주 쓰여졌다.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상당한 기간을 두개의 한국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가치 있는 결단을 내리려면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의 특성을 인식해 놓은 뒤에 주체적인 요인들에 의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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