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사는 세상|홍기두(서울대 정치학과 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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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제 철이 들 나이도 됐고 배울 것도 어느 정도는 배운 나에게 아직도 남이 알면 어이없어할, 부모에게 반말을 쓰는 습관- 물론 집안에서 그것도 가끔 이지만- 이 있다. 어머니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정도라면 요즘은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나이에 비록 집안에서 가끔 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에게 반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남이 알면 기절할지도 모를 정도의 것이리라. 한번은 친구 집에서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마침 아버지께서 받으셨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을 것으로 속단, 버릇대로 반말로 말한 것이 사고였다. 특히 귀가 밝으신 친구의 아버님께서 내가 전화하는 것을 듣고 나를 불효 막심한 놈으로 낙인찍으신 것이었다.
그후 거의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가 그 친구의 집을 찾은 경우란 겨우 두 번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친구의 아버님이 안 계신 평일의 낮 시간 잠깐이었음은 물론이다.
부모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버릇 때문에 이런 곤욕도 치르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 같은 버릇을 효와 관련시켜 반성해 본 적은 없다. 역시 나의 부모님도 이런 버릇을 효와 관련시켜 야단을 치신 적도 없었다.
따라서 이런 버릇은 집안에서만은 오히려 나와 부모 관계의 윤활유 구실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부모님의 나보다 위에 존재해 나의 행동을 통제한다는 생각보다 부모님은 나의 협조자라는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나와 부모님사이에 발생된 의견대립의 빈도 수는 상당히 많았지만 부모·자식관계를 위협할 정도의 것들은 남들에 비해 훨씬 적었던 것으로 확신한다.
나의 문제에 대해 상반되는 의견을 갖게 될 경우 아버지께선『너도 세상을 좀 더 알게 되면 내 말뜻을 이해하게된다』는 정도로 그치신다. 결국 아버지의 의견을 어느 정도로 수용하여 내 의견을 수정 보완하느냐 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영역이다. 이 같이 관대하신 부모님과 나 사이에 요즘 흔히들 말하는 대화단절 같은 것은 내가 관심을 쏟을 필요도 없는 단어였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나는 효를 단순히「자기충실」로 이해하고 있다. 즉「나의 능력을 보다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나의 부모에 대한 효」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극단적인 자기 희생으로까지 효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을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사회에는 부쩍 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효를 망각하는 경향이 자주 사회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를 위한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을 효라고 본다면 실로 젊은이들 사이에 효라는 규범이 있지 않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효를「자기충실」과 같은 입장에서 이해함이 옳다면 오히려 효는 젊은이들에게 지고의 규범으로 확립돼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족·국가의 발전이 모두 자기충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젊은이들이 이해하고 있는 효라는 규범은 그 모든 발전에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는 젊은이들을 불효란 단어로 꾸짖기 전에,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효의 새로운 뜻을 먼저 이해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끝으로「자기충실」로서의 효라는 규범을 내 모든 행동의 기반이 되도록 노력해오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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