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천혜|신춘「중앙문예」평론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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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젤」은 1인칭의 작중인물은 결코 전지적일 수 없으며, 이런 현상은 소설 기술상의 과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저」는 이것을 과오라고 보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독자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이 시점의 사용은 표현에 많은 다양성을 줄 것이다.
또 특수한 경우는 이른바 액자소설(Rahmenerzahlung)이다. 「슈토름」의 『백마의 기사』,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김동인 의『배따라기』등의 액자소설은 바깥이야기가 1인칭인데 안의 이야기는 3인칭이다. 이런 유의 소설은 모두 이 l인칭 전지적 시점에 넣는데는 좀 무리가 있지만, 액자속의 이야기는 대체로 l인칭 전지적 시점이라 하겠다.
『백마의 기사』에서 설화자는 죽기 직전의 주인공의 생각과 주인공 외에 아무도 보지 못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1인칭 설화자가 신의 위치에까지 올라간 예라 하겠다.
1인칭 전지적 시점은 1인칭 객관적 시점과 마찬가지로 주인물 단점과 부인물 시점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다시 수식을 가지고 표현하면
주인물시점 : 설화자> 주인물
부인물시점 : 설화자= 주인물
(3) 3인칭전지적시점
과거의 소설에 가장 많이 쓰인 시점이다. 설화자는 신적인 위치에서 모든 사건의 진행을굽어보기 때문에 그의 시야는 한없이 넓고, 그의 지식과 특권은 무제한이다. 그는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도 있고, 분석하고 논평할 수도 있다. 사건이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할 수도 있고, 요약해서 독자에게 보고할 수도 있다.
그는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느 작중 인물이든 상관없이 필요할 때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의 심중을 독자에게 알려준다. 물론 서술의 초점이 주로 맞추어진 주 인물이 있지만 설화자가 마음속으로 들여다보는데는 주인물과 부인물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의 눈을 피할수 있는 비밀이란 없기 때문에 이 시점은 「서스펜스」를 낳지 못한다. 설화자가 계속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독자에게 감추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행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해 가는 소설에 이 시점이 많이 쓰이며 19세기 이전의 대작들이 거의 이 시점으로 씌어졌다. 19세기 이전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토마스·만」이나 「울더스·헉슬리」와 같은 20세기의 대가들도 이 시점을 즐겨 사용했다.
우리 나라의 소설, 특히 장편은 3인칭인 경우 모두 이 시점으로 씌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단편의 경우 젊은 작가들에 의해 다른 지점의 사용이 시도되고 있지만 장편의 경우는 예외 없이 이 시점 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점의 사용에 있어 끊임없이 초점이 이인물 저인물로 옮겨지면 이야기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파괴될 우려가 있다.
또 독자에게 설화자의 존재가 항상 의식되기 때문에 독자가 소설 속에 몰입되는데 방해를 받는다.
이 시점은 설화자가 사건의 진행 중에 얼굴을 내밀고 논평을 가하느냐, 개인적 논평을 일체 하지 않는 관찰자적 입장이냐에 따라 논평적 시점과 중립적 시점으로 나누어진다. 논평적 시점에서는 설화자는 미래의 일을 예고하기도 하고 작중인물의 행동이나 사건의 진행에논평을 가하거나 자기 나름의 인생관을 피력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그리고 그의 수입의 남은 것은, 모두 자선에 써버렸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무런 구멍으로도 들어옵니다. 전주사의 집안에도 재미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 김동인의「명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야기의 진행중에 갑자기 설화자가 얼굴을 내밀고 자기 나름의 논평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중립적 시점에서는 설화자는 결코 얼굴을 내밀지 않고 이야기를 서술해 간다.
「플로베르」의 『마담·보바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현대적인 작가일수록 논평적 시점보다는 중립적 시점을 즐겨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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