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마음과 세상] 오늘을 살아갈 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세월호 참사라는 재난이 우리 사회를 덮쳤다. 지난해 충남 태안의 해병대 캠프 사건, 올해 초의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실체가 드러날수록 어처구니없는 정황이 드러나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커다란 아픔이 이제 온 국민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 같은 징후가 보이고 있다. 아마 이런 단계를 거쳤을 것이다.

처음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하는 마음이 든다. 대부분은 우연히, 낮은 확률로 일어날 사건으로만 여긴다. 그런데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고 여기저기에서 구조적 문제점들이 발견되면서 우연이란 말만으론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저 아주 극히 일부의 잘못된 행동이라면 그곳만 피하고 조심하면 나와 가족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런데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이런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이제 어디가 안전한가?’라는 의문과 불안이 생긴다.

일러스트 강일구

결국 전 국민에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 경계 경보가 울리게 된다. 보통 극심하고 예기치 못한 대형 사건을 겪고 나면 몸이 안전한 곳으로 구출된 다음에도 뇌와 마음은 여전히 현장에 머무른다. 또다시 그런 사건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고 꽤 오랫동안 인식하고 거기에 대비하게 된다. 그래서 만에 하나 있을 위험 징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고 바로 대처하기 위해 교감신경계를 활성화시켜 각성도를 한껏 올리고, 근육의 긴장도와 심장 박동수를 미리 높여 놓는다. 당장은 불필요한 소화기관은 꺼서 위장 운동을 멈춘다. 잠은 자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가능한 한 위험과 연관이 된다고 여기는 곳은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일은 사건의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큰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 9·11테러 이후 미국에선 비행기 사고에 대한 우려로 장거리 국내 여행을 할 때 자동차를 선택하는 비율이 확연히 늘어났다. 실제론 국내선 비행기의 사고로 인한 사망 확률은 6000만분의 1이고, 같은 거리를 자동차로 여행할 때의 사망 확률은 65배나 증가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대형 사고를 목격하고 나면 심리적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에 뇌는 자동적으로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잘못 계산하게 된다. 또 이를 행동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그래야 안전하다는 믿음을 갖게 돼서다. 공포로 인한 비(非)합리적 행동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먼저 세상은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다는 심리가 공감대를 얻을 수준으로 다시 확립돼야 한다. 세상은 악의 있는 사람들이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한 행동만 하는 곳이 아니라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선한 존재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바탕 위에서 이미 일어난 일을 인정하고, 충분히 슬퍼하되, 이제는 내 삶에 긍정적인 가치를 주는 것들을 찾아내려 노력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서로를 위로하는 행동은 자신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된다. 여기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때 공포는 서서히 그 힘을 잃고 사라진다. 살아남은 우리는 다시 오늘을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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