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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는 지도자보다 고개 숙인 앵커를 더 믿고 싶은 요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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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처음엔 누구나 설마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고는 늘 있었고, 안타깝지만 희생자도 늘 있었다. 하지만 한 학교 학생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는 사고란 지금 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른 구조소식을 듣고 몇 명의 희생자를 잠시 애도하며 시간이 곧 지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수라며 대책본부의 공무원이 실종자 숫자를 바꿔 말한 순간. 우리가 살아서 보는 지옥이 시작됐다.

어른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건 우리의 잘못이라고. 겉만 번지르르하게 쌓아올린 사회 속에서 애써 무시하면서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그 속에서 발끝으로라도 발돋움해 남보다 조금 위에 서며 안도감을 느꼈던, 아이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던 그 ‘세월’의 죗값을 아이들이 대신 치르는 거라고. 그래서 어른들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쏟아냈다. 그리고 듣고 싶었다. 내 탓이라고 내 책임이라고. 책임 있는 어른들이 말해주길. 그런데 책임의 꼭대기인 대통령은 화를 냈다. 내가 면목없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사과의 말은 저녁뉴스에서 나왔다. 물론 부하직원의 보도 실수에 대한 것이었지만 JTBC 손석희 앵커의 “어떤 변명도 필요 없다. 내 책임이다”는 말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희망이 있으리라 믿었다. 있어야 했다. 정부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아이들을 살려낼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단 한 명도 구조되지 않았다. 바뀌는 건 줄어드는 실종자 수만큼 늘어나는 사망자뿐이었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도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그의 침묵과 울컥함의 짧은 순간이 바로 우리의 슬픔과 자괴감이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은 대체 무엇인가. 너무 느려서 안타까운 구조에 정말 대안은 없는 걸까. 누군가 찾아주길 바랐다. 바닷속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모두의 마음이 거기에 매달렸다.

슬픔 속에서도 알아야 했다. 도대체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투박한 사투리의 전직 선원의 고발에는 민과 관, 누구 할 것 없이 수십 년 차곡차곡 썩어 있던 관행과 불법의 고름 냄새가 터져나왔다. 기막혀 하는 앵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억지로 잠재웠던 우리의 양심을 정확히 찔렀다.

참담함 속에서도 분노해야 할 시간이었다. 사고 1주일이 지나면서 정부의 안전대책이 경제 제일과 규제완화를 강조했던 지난 정권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수천억 자산가인 선사의 실질적 소유주가 얼굴 한번 내밀지 않으면서 그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전달하는 앵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제 잘못된 어른들을 직시하고 파헤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할 때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왕좌왕하는 재난대책본부에 이어 결국 재난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가 아니라고까지 하는 데서는 우리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 보장’의 준말인 ‘안보’가 재난을 당하는 국민의 생사 안전과는 별개의 일이라서 별도 부서의 일이라는 국가 ‘컨트롤 타워’에 할 말을 잃었다.

낙심한 페이스북 친구 타임라인에는 9시 뉴스의 링크와 함께 “손석희가 우리의 컨트롤 타워구나”라는 탄식이 나왔다. 그는 생사의 기로에서도 단 한 명의 생명도 건져낼 수 없는 뉴스앵커일 뿐이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썼던 사람처럼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봐야 하고 무엇을 궁금해해야 하는지, 어떤 것에 공감해야 하는지 지금 우리의 눈과 귀와 가슴의 방향을 안내해주는 컨트롤 타워가 되어 주고 있다. 이 지옥을 겪어내면서도 처연히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그들을 잊지 말고 지금의 이 슬픔과 분노가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할지, 그가 ‘앵커(Anchor)’라는 호칭처럼 불안한 이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단단하게 우리 눈과 귀의 닻이 되어주길 희망할 뿐이다.

글 이윤정 칼럼니스트 filmpool@gmail.com 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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