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아쉬움보다 오는 희망을 채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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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일 용인민속촌에서 치른 전통혼례식 때 내 앞에 선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신부였다. 네가 자그마한 얼굴에 곱슬머리로 내게 온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시간은 30년이 돼 우리를 이만큼 데려왔구나. 갓 스무 살에 시집온 철없는 엄마는 세상에서 널 처음 만났을 때 그저 산고가 끝난 안도감에 바로 안아주지도 못했어.

그 뒤로도 얼마 동안 모든 것이 서투르고 게을렀던 엄마는 허둥대고 당황하기 일쑤였지. 언젠가 열이 펄펄 나는 널 감당하지 못해 눈물을 훔치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애가 애를 낳았다고 놀려대며 웃었어. 그래도 날 엄마로 만들어 준 넌 내 삶에 가장 큰 기쁨이란다. 너를 이만큼 키워 품 밖으로 보낸 것도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란 생각이 들어.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 탓에 앞장서는 것을 꺼리는 너에게 엄마라고 왜 욕심이 없었겠니. 엄마들이 가장 큰 착각에 빠지는 대상은 자식이야. 너도 엄마에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어여쁘고 귀여운 딸이었어. 가끔 네가 천재일지 모른다는 엄마의 욕심에 학교 다니는 널 몰아붙이고 잔소리를 퍼부었던 적도 있었지. 너를 시집보내고 문득문득 ‘네가 얼마나 버겁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미안하기만 하다.

한창 희망을 키우면서도 어려운 시절이었을 사춘기에 좀 더 네 얘기를 많이 들을걸, 좀 더 너와 많은 시간을 나눌걸. 그러지 못해 가슴 한쪽이 늘 아렸는데도 네가 서른 해를 넘기도록 아픔을 다독이지도,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구나. 그런데도 밝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내 앞에 있는 네가 내 딸이어서 정말 감사하고 고맙다.

 이제 한 남자의 아내로,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엄마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딸에게 최고의 축복을 보내고 싶어 이 편지를 쓰게 됐단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고민도 했어. 아내로, 엄마로 살아갈 너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근사할까. 기대와 희망을 북돋워 주고 조금은 두렵기도 할 미지의 삶에 어떤 이정표를 세워줘야 할까.

옛날 어떤 현자가 왕의 우문에 지혜를 주었다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세상의 모든 일은 다함 없이 지나갈 것이니 이는 겸허의 미덕과 용기의 힘을 일깨우는 뜻일 게다. 은미야, 남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렴. 살면서 소원하는 것을 이뤘을 때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중에도 꼭 어렵고 불행한 사람을 돌아보기 바란다. 때론 견딜 수 없는 무게의 절망과 슬픔에 빠져도 가족을 기억하고 사랑을 놓지 말아라. 용기를 잃지 마라. 네 마음자리엔 항상 지나간 것들의 아쉬움보다는 다가오는 희망으로 가득 채우길 바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며 겸손과 위안을 간직하고 나누길 바라.

내 앞에 나보다 더 성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딸 은미야. 행복하렴, 무조건 행복하렴.

엄마 신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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