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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의 인간과 문학 (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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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가 두 차례 중국에 갔던 것은 1927년. 당시 광동에서 그는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욱 혁명적인 모험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광동 국민당 우파 조직 장개석군의 부조리 재거에 대한 투쟁에 지원했거나 또는 가담했던 것으로 복수 있다. 그 자신의 기록이라고 인정되는 33년에 나온 『인간 조건』에서 이러한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파괴하는 「숙명」 「수치」 「증오」,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과의 전투를 개시했다.
『인간 조건』의 주인공 북경 대학 교수 「기소로스」는 『인간은 각자가 누구나 신이 되기를 꿈꾼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자신의 말이다.
『인간 조건』으로 일약 「프랑스」 문단의 총아가 된 그는 「로렌스」의 권고로 「아라비아」 사막을 찾았으나 실망 끝에 「파리」에 돌아왔다.
그 때 「유럽」에는 「나치」의 검은 구름이 덮치기 시작했었다.
그는 「파리」에 당시 망명 중이었던 「레온·트로츠키」와 만나 친했으며 34년 「모스크바」의 소련 작가 동맹 회의의 초청을 받아 「막심·고르키」를 만났다.
「말로」에게 혁명적 모험주의란 반「나치」·반 인종 차별주의였다. 「모스크바」에서 공산당 작가 동맹과 반「나치」투쟁에 나선 그는 「히틀러」가 의사당 방화 사건의 혐의를 걸어 체포한 「디미트로프」를 구출하기 위해 「앙드레·지드」와 함께 「베를린」에 가서 『경멸의 시대』라는 유명한 보고서를 낭독했다.
「스페인」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그는 즉각 공화국군 쪽에서 참전했다. 그는 외국비행대를 조직해서 「프랑코」군을 쳐부수는데 전공이 혁혁했고 3차나 부상을 입었으나 계속 공화국군이 밀리자 미국·영국·프랑스에 호소해 원조를 구하는 정력적인 투쟁을 계속했다.
그의 부조리의 실존 문학이 「사르트르」와 「카뮈」에 앞섰던 것은 「카뮈」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말로」가 먼저 받아야 했다는 발언으로 입증된다.
말로의 가정은 그 사이 30년에 아버지가 자살했고 「클라라」도 딸 「플로렌스」와 함께 떠나 가족적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가 밖에서 반「나치」·반 「파시스트」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조국이 「나치」의 발길에 짓밟히고 있었다.
그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자진 가담, 드디어 피의 「나치」 해방 투쟁을 지도할 수 있었다. 「코레즈」 지방 「레지스탕스」 「게릴라」 대장 「베르제」로 둔갑해 나타났던 그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의 일환으로 「나치」군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천5백명의 부하들을 거느린 「베르제」사령관은 44년6월 「나치」 1개 사단과 격전을 벌인 끝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게슈타포」의 고문을 받은 그는 『너는 내일 아침 총살이다』는 선고를 받았다. 「말로」는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 죽음과 인간 조건의 구호처럼 정면 대결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이튿날 사형 집행을 당하지 않았다. 독일 군대는 그에게 사형 집행을 위협 겸 농담으로 말했던 것이다.
그는 「툴루즈」 형무소에서 「레지스탕스」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한 후 「나치」를 「라인」강까지 쫓아가 싸웠다.
이때부터 그는 결코 입에 담지 않았던 신에 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드골」과 만나 밀접한 협력자가 됐으며 74년 대통령 선거 때 「지스카르」를 밀지 않고 「드골」파의 「샤방-델마스」를 지지한다고 해 「드골」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그가 「스페인」 전쟁 때 만난 연인 「조세트·클로티」는 44년9월 「레지스탕스」 과정에서 처참하게 학살당했으며 두 동생 「롤랑」과 「클로드·말로」도 반「나치」 투쟁 중에 비극적으로 죽었다. 「롤랑」의 처, 즉 「말로」의 제수 「알렝·만들렌」은 탁월한 「피아니스트」로 48년도의 「말로」의 제3부인이 됐으며 두 아들·「고티에」와 「벵상」을 61년 교통 사고로 잃어 『오 이 찬란한 부조리여!』라고 탄식케 했다.
「드골」밑에서 11년간 문화상을 지낸 그는 현대의 문예 부흥을 기도했다. 「말로」는 「나폴레옹·보나파르트」에게 「스탕달」이, 「프레드리히」 2세에게 볼테르가 곁에 있었듯이 「드골」곁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말로」는 그의 신비를 간직한 유례없는 시대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그가 반 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한 기자가 『왜 반 회고록인가? 어째서 「반」이란 말이 붙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나는 내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나르시소스」의 거울을 거부했던 것이다. 【파리=주섭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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