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장소는 상처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몇 해 전 책을 유난히 좋아하는 한 라디오 PD가 대뜸 따져 물었다.

 “전국의 좋다는 데는 혼자 다 다니면서 왜 그렇게 울분을 토하고 다녀요? 가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처음엔 웬 시비인가 했다가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내 나는 내가 쓴 여행기사를 죄 찾아 읽었고, 난데없었던 그녀의 지적을 잠자코 수긍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여행은 우울했다.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은 불편했고, 땅을 디디는 걸음은 비틀댔다. 방방곡곡 헤집고 다닐수록 나의 여행은 침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나는 길 위에서 울고 다녔다.

 말하자면 아는 만큼 아팠다. 삼천리 금수강산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우리네가 이 땅에 새긴 생의 내력을 알고서부터 나는 우리네 산하를 마냥 감탄만 할 수 없었다. 이 산에 얹히고 저 바다에 밴 우리네 삶은 기구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제주올레를 걷는 건 섬의 고단한 일상을 지켜보는 일이었으며, 지리산에 드는 건 빨치산의 역사를 목격하는 일이었다. 강화도 광성보에서는 신미양요가 얼마나 끔찍한 학살이었는지 배웠고, 안동에서는 가미카제(神風)에 휩쓸려 죽은 몽골군 대부분이 고려인이었다는 걸 알고서 몸서리쳤다. 우리네는 배가 고파서 흰 꽃 핀 나무를 밥나무(이팝나무)라 불렀고 새가 울어도 ‘솥 적다(소쩍새)’는 소리로 들었다. 이 땅의 모든 게 서러워서 길 위의 나는 내내 아팠다.

 그리고 진도 앞바다. 진도 팽목항 남쪽 조도 앞바다. 조도(鳥島)라는 이름대로 섬이 새처럼 많은 바다. 국립공원이 된 다도해 푸른 바다. 봄이면 참조기가 지나고 여름이면 은갈치가 올라오고 겨울이면 삼치가 펄떡이는 고마운 바다. 국토해양부가 선정한 다도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자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지정한 명품마을 1호 관매도가 있는 그 바다. 선홍빛 석양이 참 고왔던…, 바로 그 바다.

 이제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바다를 더 이상 아름답다고 노래하지 못한다. 이제 그 바다는 통곡의 바다고 분노의 바다다. 온 국민의 눈물바다다. 하필이면 씻김굿의 바다가 이 바다다. 바다에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당신의 극락왕생을 비는 바다다. 원통하고 절통해서 못 가겠다는 당신을 훠이훠이 떠나보내는 바다다.

 나의 여행은 한동안 더 우울할 것이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이 땅에는 너무 많다. 세상의 모든 장소는 상처로 기억된다.

손민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