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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집단 트라우마,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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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감정은 전이된다. 감정에는 행복이나 즐거움처럼 긍정적인 감정도 있고, 공포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그 전파 속도가 훨씬 빠르다. 특히 이번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극단적인 슬픔과 분노는 온 사회로 퍼져서 사람들의 마음을 할퀴고 있다.

 몸에 상처가 나면 흉터가 남는다. 치료를 잘 받지 않으면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흐른다. 정신적으로도 큰 사고를 겪고 나면 정신적인 후유증이 남는다. 이것이 소위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다. 생존자들도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다. 나만 살아남았다는 자책이나 미안함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우울해지는 현상을 ‘생존자증후군’이라고 한다.

 모든 피해자나 생존자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나 생존자증후군을 겪는 것은 아니다.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은 망각’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뇌가 자기 보호를 하기 위해 방화벽처럼 기억을 차단하기도 한다. 그렇게 흘러가야 산 사람은 살 수 있고, 90%는 평소 생활로 돌아온다. 10% 내외만 정신적 후유증이 남는다.

 그런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이러한 질환의 자세한 증상을 말하기 꺼려한다. 재난 발생 시에는 사람들의 피암시성(被暗示性)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 나도 그런데?’ 동일화(同一化) 현상 때문에 없던 증상도 생길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정이 많고 집단의식이 강하다. 이번 사고도 온 국민이 가슴 아파하고 ‘내 일’처럼 느끼고 있다. 슬픔을 나누고 애도를 하는 것은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고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너무 감정이입을 강하게 하면 자칫 재난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람조차 정신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마치 자신이 사고의 당사자인 것처럼 공포·분노·불면·우울과 같은 정신 증상을 겪을 수 있다. 이것이 2차 트라우마(trauma)다. 이게 확산되면 피해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국민이 집단 트라우마와 집단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이건 안 된다.

 우선 생존자들의 2차 트라우마를 막아야 한다. 구조된 승객들은 일단 현장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피해 학생들에 대한 심리적인 치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일단 현장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가족들의 품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외부인과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언론 접촉을 막아야 하고 뉴스를 보지 않도록 한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나 괴담이 돌면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물에서 사고가 나면 살아나기도 어렵고 구조하기는 더 어렵다. 현장에 없던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섣불리 책임 소재를 따지거나 불신을 가중시키는 말이 자꾸 떠돌면 생존자의 입장에서 죄책감이 가중될 수 있다. ‘내가 잘 했으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자책과 후회를 반복하면 자살과 같은 사고가 또 발생할 수 있다. 평소 생활환경으로 돌아가도록 적응시키는 한편,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는 반드시 숙련된 전문가를 통해 정신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

 둘째, 피해자 인터뷰나 현장 중계방송에 신중해야 한다. 일주일 내내 TV로 현장 중계를 하는 것은 시청자의 뇌를 학대하는 행위이다. 그 영상이 대뇌에 후유증을 일으킨다는 것은 연구 결과로 입증된 사실이다. 2001년 9·11 테러 때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보다 먼 시골에서 TV로 세계무역센터 건물 붕괴와 희생자의 울부짖는 모습을 반복 시청했던 사람들한테 정신적 후유증이 더 오래 남았다. 지금 당장 피해자 시신 이송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생존자가 발견되길 바라는 희망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모든 언론이 이 사건에만 매달려서 중계방송을 계속 한다면, 결국 온 국민이 집단 트라우마에 빠질 우려가 있다. 특히 경쟁적으로 피해자나 가족을 인터뷰하는 행태를 바꿔야 한다. 공동 결의하되 그 외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셋째, 모두가 입조심을 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희생양을 찾는 집단심리가 작동한다. 섣부른 비난이나 단발성 분노는 국민을 집단 히스테리 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 사고의 책임 소재는 차분히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자. SNS에 개인 견해를 올리는 것도 신중히 하자. 확실한 사실이 아니면 입을 다물자. 그것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막는 길이다.

 지금은 각자가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차분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망가진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 투자 없이 발전 없다. 미국은 전쟁과 9·11 테러, 일본은 지진과 쓰나미를 겪으면서 피해자와 일반 국민에 대한 정신건강 대책을 연구하는 데에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다. 청소년·노약자 같은 트라우마 취약계층 관리방안,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방지 처방법, 집단적 대응 매뉴얼 등이 크게 발전했다. 이러한 합리적 접근이야말로 국민을 가장 확실하게 안심시키고 2차 트라우마를 예방하는 길이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