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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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모택동 사후의 중공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있는 것 같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강청 왕홍문 등 강경파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있고 난 다음에야 화국봉이가 주석이 됐다는 정식발표가 나왔다.
이른바 모택동 노선이 단순히 표류중인지, 아니면 완전히 난파되었는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모택동 노선은 이미 그의 생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75년1월에 있었던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모 주석은 참석치 않았다.
건강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해지리라 짐작한 모가 부터 「보이코트」한 것이라고 「뉴스위크」1월27일호는 풀이했었다. 실제로 이 대회에서 모의 귀염둥이 왕홍문이 패퇴했었다.
「뉴스위크」지는 또 이렇게도 보도한바 있다. 『모는 자기가 물러난 후에 급진파가 중공을 이끄는데 동의하도록 군부에 역력을 넣으려다 실패했다. 군부는 오히려 무한교외에서 따로 회합을 갖고 여기서 모로 하여금 37개조의 자기비판을 하게 하였다.』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은 아무래도 지난4월5일의 청명절때 1백만 북경시민이 당국의 제지를 무릅쓰고 성묘에 나선사건과 또 그 뒤를 이은 천안문광장에서의 난투사건을 꼽을 수 있다. 모가 평소에 내걸던 것은 박고 후금이었다. 옛것을 가벼이 하고 현재를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사상을 파괴하려는 것으로 중국인들에게 예부터 두터웠던 조상숭배사상에 대한 전면 부정을 명령한 것이다.
그런데도 때마침 주은래의 죽음을 맞아 민중은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수상에 대한 헌화를 위해 천안문에 몰려왔다.
이때 천안문광장에 몰려든 민중은 2백만명. 북경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숫자였다.
그것은 바로 반모시위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헌화가 하룻밤사이에 철거되자 난투극으로 폭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고 볼 수도 있다.
중공의 사정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한 중공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중공 안에는 문화파와 주자파의 대립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밖에도 대중·군부·하방청년 등이 다섯 갈래로 얽혀서 대립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방 청년이란 고졸이상의 교육을 받고 지방에 파유되는 청년을 말한다. 이것도 「부르좌」출신의 흑오류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갈라진다.
모택동의 집권 반세기. 그러나 그가 애써 구축해놓은 권력구조만으로는 중공의 8억 인구를 통어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결국 화국봉이 다섯 갈래의 물결을 어떻게 타고 나갈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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