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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서화백년(7)|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721)-제자 김은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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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술회 사랑방>
서화미술회 사랑방은 매양 손님들로 문전성시였다.
당시의 세도가·선비·미술애호가들이 모여서 시회도 열고 바둑도 두었다.
소림·심전선생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화평회도 했다.
3·1운동때 민족대표로 활약한 권동진·오세창, 서예가 안종원·나수연, 전의 김창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우판인쇄소를 경영하던 김석진·박기양(지금은 고인이된 연극인 박진씨 엄친)씨 등을 매일 나오다시피했다.
이완용도 심심찮게 사랑방에 나와서 놀다 갔다. 사랑방 손님들은 글줄이나 하는 미술애호가들이어서 화제는 으례 시화촉으로 기울었다.
저녁때가 되면 심전선생댁에서 술상을 차려 내왔다. 술잔이 몇순배 돌아서 취흥이 도도해도 주정이라고는 없었다.
술을 마셨는지 안마셨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이따금 호탕한 웃음소리가 공부방에까지 들려 올 정도였다. 이태백이나 두자미의 시를 읊고 그들의 시심에 빠져 시담을 하기도했다.
이태백의 『산중문답』(문여하쟁 서벽산, 소이부답 심자한, 도화유수 향연거, 별유천지 비인간)을 화제로 그림을 그려보자는 제안도 나오곤했다.
때로는 소동파의 『적벽부』가 막이 나직하게 울려퍼지는 이변도 있었다.
김병연(김삿갓)이 금강산 경치를 글로 쓰면서 『야차화공 모차경, 기어림하 조성하』 (만약 화공을 불러다 이 경치를 그릴양이면 수풀 사이를 오르내리는 새소리를 어떻게 표현 할 것인가?) 라고 걱정한 대목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누군가가 심전선생에게『심전은 새소리를 어떻게 그리겠소?』하고 술이 거나한 김에 말을 꺼냈다가 실지로 해답을 들은적도 있다.
심전선생은 화필을 틀고 먼저 금강산경을 그린다음 숲에 앉은 새를 그려놓았다. 성급한 손님이 『그것은 새가 나무에 앉은 그림이지 우는 그림이 아니오』하고 넌지시 충동질을했다.
심전은 얼굴빛 하나 변함없이『과연 그렇군. 이렇게 하면 되겠소』하고는 나무 아래에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놓고 쾌재를 불렀다.
그때서야 심전의 화의를 알아차린 좌중은 무릎을 치면서 차탄해 마지않았다.
술은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까지 계속되었다 .2차는 야주개 (야주현·지금당주동)에 있는 심전선섕댁 경묵당에서 벌어졌다.
소림선생댁은 북묘근처(지금보성중고교옆)에 있었지만 두분이 다 술을 좋아하는 터여서 항상 붙어 지냈다. 소림선생은 심전선생보다 8세나 위인데 서로 너 나 하고 벗했다. 두분은서로 대조적이었지만 지기가 상통하는 막역지문이었다.
소림선생은 잘사는 촌노인처럼 수수했고, 심전선생은 수염이 하얗게 난데다 용모가 단정하여 풍채가 당당했다.
누구든지 그릍 대하면 압도당할 것 같은 위풍을 떨치고 있었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디서 한목에 큰돈이 생기면 우선 시장에 가서 포·생선같은 안주감올 듬뿍 사고 돈이 남아야 쌀올 사왔다. 집에는 항상 가양주가 떨어지질 않았다.
서화학교 사랑방에서는 석파(대원군 이하응)와 오원(장승업)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거론되었다.
대원군의 난초·그림은 으늘날도 유명하지만 그 당시에도 화제가 되었다. 서화미술회 선생으로 있는 소호(김응원)가 석파의 그림을 대작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소호의『총난도』는 대원군이 허소??에게 그려진『묵난』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다. 사랑방에서는 소호선생에게 『자네 그림이 석파 것보다 낫네』 하고 추켜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소호는 석파의 난치는 법을 물려받았지만 묵난으로는 일가견을 이루었고 글씨도 예·행화에 능했다. 묵난으로야 완당(김정희)의『우연사출난도』, 운미 (민영익)의『묵난초』를 꼽지만 석파나 소호의 작품도 한손에 들수 있는 걸작으로 인정되었다.
오원은 그 생애가 워낙 재미있는데다가 소림·심전선생이 모두 오원 화법의 영향을 받아서 사랑방에서 단골 화제가 되다시피했다.
그무렵은 이미 오원이 종적을 감춘지 5년이 지난후였지만 아무도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몰라 행여나 그가 살아있지나 않나 하는 한가닥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을 때였다. 소림·심전의 젊었들때 그림이 오늘날도 오원그림 행세를 하는 것은 두분이 모두 오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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