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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9. '조선책략'의 허와 실(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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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저는 '조선책략'이 미국에 대한 잘못된 허상을 전파하고 친미파를 길러내는 발판 역할을 함으로써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침략의 길을 열어준 '트로이 목마'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에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알려준 희망이었다고 봅니다.

'조선책략'이 제기한 두 가지 생존전략, 곧 주변 열강들 사이에 힘의 균형을 만들고(대외적 균세론: 均勢論), 부국강병을 도모하라(대내적 자강론: 自强論)는 전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박선생님 지적대로 이 책에 담긴 영토 확장욕에 불타는 야만국 러시아, 약소국 편에 서는 부강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한 미국의 이미지는 황준헌이 청국의 이해에 맞춰 날조.왜곡한 흑백사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황준헌을 비롯한 청국 지도부의 지적 수준이 실질적 구속력이 없는 미국의 외교적 수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만큼 저급했다거나, 조선사람들이 그처럼 왜곡되어 있는 남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860년 베이징(北京) 함락 이후 청국이나 조선은 자력만으로는 적대세력을 막을 수도,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도모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렌슨(George Alexander Lensen)의 지적처럼, 이홍장이나 고종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통적 외교 술책에 의존하는 '책략의 균형(balance of intrigue)'을 꾀하였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뛰어든 1876년 이래 국권을 빼앗긴 1905년까지 30여년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열강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도모한 책략이 유효했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조선 정부는 개항 이후 줄곧 러시아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청.일 두 나라의 러시아 위협론을 맹종했다기보다는,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이들 두 나라를 견제하는 데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더욱 거세진 청국의 압력을 견제하려 한 '인아거청책(引俄拒淸策)'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 세기 전 한반도를 열강의 즐거운 '이권 사냥터'로 만들었던 조선정부의 이권 양여 정책도 이러한 이이제이에 입각한 균형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정부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에 유전개발권을 준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경부.경인 철도 부설권과 운산 금광 채굴권 같은 노른자위 이권을 미국에 준 이유가 단지 순진하게 미국의 '의리'를 믿은 때문일까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으로 제국의 오만을 과시하는 현재의 모습과 달리 백년 전의 미국은 선생님 말씀대로 '상리'만 좇는 2류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국제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지금과 전혀 달랐지요. 그런데 저로서도 개화기의 조선사람들은 왜 그런 미국에 일방적인 짝사랑을 퍼부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그 이유를 당시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이해의 크기와 소재 -영토적 야욕, 전략적 동기, 경제적 이익, 문화적 욕구 -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최강대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에 큰 욕심이 없었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미국은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전략적.경제적 동기만 갖고 있었던 데 비해 제국주의라고 할 수도 없는 '부차적(secondary) 제국주의' 국가인 청.일 양국은 조선에 매우 절실한 이해가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정부는 청국과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이용하려 했던 것 아닐까요. 지금의 미국이 동아시아 지배를 위해 한국에서 추구하는 전략적 동기를 그때의 미국은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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