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작가 윤고은의 호기심 취재파일 ③] 자존감 회복이 성공의 제1조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연애는 결코 의무가 아니다. 연애를 마음에서 내려놓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누군가가 내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다가오기도 한다.

생존과 직결되는 가치는 아니라는 게 연애를 미루는 대학생들의 의견이다. 대학생 C는 “연애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올인한다고 해도 자기관리를 제대로 해놓지 못하면 졸업 후 연인에게 뒤통수 맞는다”고 했다. 연애를 하면서 들어가는 시간, 금전, 체력, 정신에너지를 아깝게 느끼는 이도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요즘 말로 ‘썸남’, ‘썸녀’라고 하던가. 잠깐의 호감이 빚어내는 관계들은 많지만 ‘썸’ 이상의 관계, 그러니까 책임감과 안정감, 또는 부담이 따르는 관계를 원치 않는 청춘도 많다. 생존경쟁으로 바쁜 이들에게 연애는 사치라는 것이다. 평생 연애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자꾸 미루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연애가 사람들의 타이밍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원할 때 좋은 연인을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지금 여기, 연애학원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도 단지 연애를 미뤘을 뿐인데 너무 오래 혼자인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저희 학원에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는 지금까지 연애를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분도 많아요. 요즘 말로 모태솔로죠. 한때는 취업준비에 애쓰느라, 또 취업하고서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경 쓰느라 연애를 놓친 거예요. 그러다 마흔이 가까워지면 결혼하라는 압박이 들어오고 하니 소개팅도 해보고 결혼정보회사 통해서 사람도 만나보고 하는데, 만남이 잘 안 되고 불편한 거죠. 그래서 찾아오시는 분이 많아요. 이미 연애에 대한 압박감으로 마음이 한참 무거워진 분들이죠.”

그렇게 압박을 느끼며 찾아온 이들은 서둘러 연애 대상을 찾으려 한다. 이미 결혼이라는 과제가 전제된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은영 코치는 결혼을 목적으로 한 연애를 서두르면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결과에만 집착하는 연애는 이미 연애가 아닌 것이다.

김 코치는 고학력, 고소득의 남성일수록 수동적 연애를 하는 확률이 높다고 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힘들어하고 상대가 거절하면 어쩌나 겁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 입을 것을 지레 두려워하면서 어찌 사랑이 가능할까.

“제가 화술이 좀 약해서요.” 이런 고민을 호소하는 이들은 거의 남성이다. 유머러스한 남자가 인기라는데 자신은 유머러스하지 않아서 어쩌느냐, 재미있는 이야기를 몇 개 외워 다니는데도 소용이 없다, 화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등의 고민이다. 그러나 긴장한 티를 내는 것만큼 역효과가 나는 게 또 있을까. 김은영 코치는 이렇게 긴장한 남성들이 그 자리에서 상대방의 말에 무조건 ‘예스!’를 외칠 확률도 높다고 한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는 강박이 지나친 나머지, 예스맨이 되었다가 뒤늦게 연애가 이어지는 과정 중에 더 큰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키도 마찬가지예요. 키가 작은 남성분들의 경우 특히 자신이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키 때문이라고 못박아두시는 분도 많은데, 사실 원인은 키가 아니죠. 주변에 키가 작아도 연애를 잘만 하는 인기남이 얼마나 많습니까? 외모, 학벌, 연봉 그런 스펙이 연애를 결정짓는 게 아니거든요. 사실 연애가 힘들다고 호소하는 분들의 가장 큰 원인은 자존감이 낮다는 거예요. 그걸 회복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에요.”

1대 1 상담 때 늘 강조하는 것이 자기 자신만의 연애관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잘 통하는 사람과 같은 막연한 기준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연애란 어떤 것인지, 내가 원하는 연애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연애관을 세워놓는다고 해도 누군가를 만나면, 연애는 공식이 아니기 때문에 부딪치고 다툴 수 있어요. 실패할 수도 있죠. 그렇지만 연애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와 조율할 능력이 있거든요. 무턱대고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보다 훨씬 즐겁고 현명하게 연애할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그렇게 연애관을 세워놓는다고 해도 누군가를 만나면, 부딪치고 다툴 수 있다. 그러나 연애 철학을 정립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높다는 설명이다.

공식 외기보다 연애철학을 정립하라

그러면 연애를 배우러 온 사람들은 모두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걸까? 당연히 아니지만, 연애를 시작하게 되지 않아도 다른 것을 얻게 된다. 아이비리그를 나왔던 한 20대 남성은 처음엔 꽁꽁 속내를 가둬놓은 듯했지만 수업을 계속 받으면서 결국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나중엔 평소 복용하던 우울증 약도 끊게 되었다고 한다.

외과의사로 일하는 30대 남성은 표정을 되찾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웃지 않는 얼굴이었는데, 수업을 계속 듣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무표정 뒤에는 너무 권위적이어서 마냥 어려웠던 아버지와 경직된 직장생활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늘 주눅이 들었고, 의사 사회에서는 주눅들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겨야 했다. 여자를 만날 때도 무의식적인 긴장상태는 풀어지지 않았다.

몇 달간의 수업을 통해 그가 얻은 건 표정이었다. 설익은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가 연애를 시작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편안해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김은영 코치는 연애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사람들에게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러브픽션>이라는 두 편의 영화를 추천한다. 이 영화들은 연애의 환상을 싹 걷어낸 일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연애라는 게 결국은 정말 두 인간 사이의 ‘교감’이란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코치에게 최고의 연애가 등장하는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다. 그 영화 속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모두 지운 사람이 등장하지만, 두 사람은 기억이 없이도 또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순간순간 잊는다는 것, 그래서 사랑엔 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건 그가 믿는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이 연애코치의 연애는 과연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슬쩍 물어봤더니 ‘문제투성이’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특강은 학교나 기업체에서도 인기다. 김은영 코치는 “연애가 정체성 형성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닌 만큼 십대 시절부터 수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연애는 고유명사로 다가온다

“요약하자면 ‘혹독하고 다양하게?’ 전 좀 애정결핍이 있었거든요. 만나는 남자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애썼어요. ‘날 사랑 한다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런 말들 있잖아요? 그 폭풍같던 연애가 지나간 후 30대 중반에야 비로소 깨달았어요. 아, 원인은 내게 있었는데 다른 데서 위로받으려고 했구나, 하고요. 그때 내 문제를 가지고 공부를 하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요즘 연애를 일부러 거세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 연애학원에서 물어본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연애는 인간이라면 꼭 해야 하는 걸까, 하는 것. 그 물음에 돌아온 연애코치의 답은 조금 의외였다. ‘연애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연애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 다른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연애코치는 연애학원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수업 첫날, 연애는 결코 의무가 아니라는 말을 건넨다. 신기하게도 연애를 마음에서 내려놓는 순간, 어딘가 또 하나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은 조금 더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누군가가 뚜벅뚜벅,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오기도 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도 연애코치가 등장한다.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연애코치인 셈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이유로 시인을 동경하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따라다니며 묻고 또 묻는다. “시가 뭐죠?”, “은유가 뭐죠?”

“난 내가 쓴 시 이외의 말로는 시를 설명하지 못하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지. 마리오,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뿐이네.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보게. 그럼, 은유를 알게 될 거야.”

마리오는 스승의 조언대로 해변을 걷고 또 걷는다.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는 해를 관찰한다. 온몸으로 은유를 배우려던 마리오에게 저만치 시가 걸어오기 시작했고, 그 시보다 조금 더 빨리 사랑이 다가왔다. 감정표현이 부족하던 마리오는 짝사랑하던 여인 베아트리체에게 이렇게 열정적으로 구애하기에 이른다.

“당신의 미소는 장미요, 땅에서 움트는 새싹이요, 솟아오르는 물줄기입니다. 순결한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은 파도가 부서지는 백사장에 있는 것입니다.”

멋들어지게 은유를 구사한 마리오는 마침내 자신만의 완벽한 은유를 구사하게 된다. 그건 스승인 시인 네루다도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마리오 스스로 체화해낸 무엇이었다. 마리오는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말로 “베아트리체!”를 외친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은유’를 구사하는 한 사내를 보며 관객은 연인의 탄생과 동시에 또 한 명 시인의 탄생을 목격한다.

이 영화에서 마리오가 시를 배워나가는 과정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과정과 닮아 있다. 조언자는 어디에나 있다. 조언자는 때로 필요하다. 그러나 조언자는 조언자의 몫을 할 뿐, 시든 사랑이든 결국 그것을 체화해서 발아하듯 밀어 올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시의 언어가 그렇듯, 사랑의 언어에 있어서도 정해진 공식은 없다.

그리고 정말 멋진 시와 사랑은 때로 멀쩡하던 공식과 규칙, 예측 가능한 리듬을 쓰나미처럼 무너뜨리면서 다가온다. 그때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면 된다.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그 말, 누군가의 이름. 모든 연애는 그렇게 고유명사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고은

온라인 중앙일보·월간 중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