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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유학 시절<제50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필자소개
필자 조탁홍 여사는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여자 보통학교를 거쳐 29년 일본동경여자고등사범 가정사과를 졸업했다.
그후 전남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계신여중부교장 창덕여중·고교장, 경기여중·고교장, 학교법인 계신학원이사장. 국민대학교수등을 역임, 현재는 계신여자사범대학 학장에 재직중이며 여성지도자와 여성교직자 양성에 진력해 왔다.
또 조여사는 대한가정학회를 창립(1948)해서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대한 적십자사 중앙위,대한소녀단 중앙위,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임원을 역임 하면서 사회봉사와 여성지위 향상에도 기여했다.【필한자】
붓을 들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란 제목의 글을 쓰라는 청탁을 받고 나는 한동안 주저 하였다. 한사람의 생애가, 혹은 그의 업적이, 혹은 그의 가르침이 후세에 귀감(귀일)이 될만한 훌륭한 분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고 또 내 주변에도 여러분들이 개시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나름의 개성이 있고 그개성에 따라 각기다른 인생을 경영하기 마련이며 각사람의 체험세계가 또한 다양하여 형형색색의 삶, 혹은 개성적인 인격들이 상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굳이 사양 않고 붓을 든 까닭도 내가 어디 내세울 만한 위대한 삶을 경영 하여서가 아니라 실로 평범한 한사람이 어떤 시대·어떤사회를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이야기해 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이를 기회로 나의 전 인생경로를 한번 되돌아보고 반성할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겠기에 이에 무딘 붓을 부끄럽다 않고 들었다.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것은 1925년 내 나이 만으로 19세때 였다. 어찌해서 내가 동경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는가를 선명하기 위하여서는 나의 유년기 이야기가 다소 필요 하겠기에 유학을 떠나기 까지의 주변상황을 간단히 이야기 하겠다.
원래 우리집안 백천(백천=배천)조씨는 고러때에 송나라의 세째 왕자가 우리나라 황해도 쪽으로 이주하여 근거를 잡고 정착하여 성씨를 조씨로 하였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본이 백천이 되었다 한다. 나는 l908년 서울에서 아버님 (조명진)과 어머님 경주 차씨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라버님 세분이 계셨는데 세째 오라버님과 나사이가 일곱살이나 차이나게 한참 떴기 때문에, 그리고 또 딸이 하나였기 때문에 형제들의 사랑과 웃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시피 하고 자랐다.
나의 아명은「홍이」였는데 아버님께서는 특별히 나를 귀여워 하셔서 예쁜옷·맛있는 음식 뿐만 아니라 조금 특이한 물건이 있으면 두었다가『우리 홍이에게 주라』고 말씀 하셨다. 또 오라버님들도 모두 나를 끔찍이 사랑해 주어서 서로 나를 업겠다고 다투기까지 하였다.
그때는 한일합방 직후라 아버님께서는 일본 사람 아래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결의를 가지시고 지방 (경남 하동)에 낙향하여 사셨다. 따라서 서울에는 어머님과 오라버님.세분,그리고 막내인 나, 이렇게 살았으며 아버님은 1년에 수삼차 상경하시곤 하셨다. 내가 경상도 하동에 가 본 것은 아홉 살 때가 처음인데 나이 들면서 자주 왕래하였고 내가 지방 사투리중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잘 알아 듣는것도 이 때문이다. 하동에는 서모 진주집이 아버님을 모시고 있었다. 관기로서 옥관자까지 탄 분인데 인품이 넉넉하고 또 무자 (무자) 하여 내가 가면 온갖 점성으로 보살펴 주던 생각이 난다. 더운 물에 목욕시켜 고운 옷을 입혀주고 좋은 솜씨를 다하여 만든 음식을 먹이고자 애를 썼다.
이렇게 여러 어른과 형제의 사랑을 과분할 정도로 받고 자란 나에게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고 남녀 구별없이 교육을 받게 해주신 분은 나의 아버님 이시다. 아버님은 일찍 개명하신 분으로 단발도 일찍 하셨다. 집에 오시면 언제나 나를 무릎위에 앉히시고 아주 조그마할 적부터 글자를 깨우쳐 주셨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때 들은 역사이야기는 나의 지식의 윈천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명 깊은 것이다. 열한샅 먹었을 때 오라버님들과 더불어 칠언절구의 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아버님은 언제나 그 심만에서 나에게 강원을 매기시곤 하였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푸대접을 받는다든가 오라버님들에게 부당하게 양보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 반대로 상당히 우대를 받았다. 그리고 벌써 네다섯살 때 부터『우리홍이는 대학까지 보낸다』고 하시는 아버님의 말씀을 자주 들어 왔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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