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1)외국유학시절<제49화>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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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생지도>
「런던」 대학은 원래 각 독립된 여러개 단과대학이 합쳐서 종합대학교로 발전된 것이다.대학교 전체를 지휘하는 총장을「찬셀러」라 하고, 단과대학학장을「프레지던트」라고 하며각대학안의 과장을「프로페서」라고 하여 과주임의 임무를 맡기고, 그 아래 차석쯤 되는 사람을「리더」(Reader)라고 하여 학술연구를 관할케한다. 그리고는 모두 강사(렉처)라고하는데, 그것을 전임과 시간강사 두종류로 나눈다.
그리고 직속대학에 다니는 학생을 교내학생(Internal Student) 이라고하고, 다른대학이라도「런던」대학이 인정하는 선생(Recognized Teacher)이있는 대학에서 지도를 받아도「런던」대학의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에 속하는 학생을 교외학생(External Student)이라고 하는 제도가 있어 먼지역에사는 학생에게는 참으로 편리하게 돼있다. 예를 들면 「홍콩」대학에 인정교수가 있으면 「홍콩」에서도 「런던」대학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근무하게된 대학이름은「런던」대학교 동양및「아프리카」연구학교(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라고 하여「런던」대학교에 직속된 단과대학인데 보통 약칭으로는 그머리글자만 추려서 SOASUL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동양과 「아프리카」 각국의 언어와문화를 연구하는데, 그리고 또 그 전체를 교루시키는 음성학과가 있다.
이 대학은 바로 옆에「런던」대학본부가 있고, 대영박물관도 그근처에 있어 여러가지로 진학이 편리한 자리에 있을뿐아니라 동양과 「아프리카」 언어 연구의 특수학교로서 각계각층에많은 봉사를 하고있다.
이대학의 학장은 「산스크리트」어의 세계적 권위자 「터너」교수이고, 음성학과 과장은 언어학에 유명한 「퍼드」교수고, 극동학과과장은 나를 초청한「사이먼」(Simon)교수다. 내가 첫학기에 담당한것은 내가 도착이 늦어서 10월초부터 학생모집을 못했기에 우선 극동과의 선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는 것이었다. 중국어계통으로는 「사이먼」주임의 아들 「캐나다」출생인 「다우너」, 중국사람「류」등이고 일본어개통으로는 일본여자와 결혼한「대니얼」씨와 그와 반대로 영국여자와 결혼한 「야나다」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어학지식이 있는 분들이었으니 한글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특히 나는 영어와 비교하면서 발음과 문법을 주로다루었다. 주임의 속셈으로는 이사람들을 위해서 여러학기 강의를 계속해서 그중에서 한글학자를 양성해서 한국과가 생기면 거기 전속으로 채용할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전공분야가 따로 있기때문에 내가 기대한만큼의 열성이 없었다.
그 다음 학기마다 학생을 모집했는데 중국어과나 일본어과에 비해서 많지 않았는데 그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학생은 호주에서 온 학생「에그딩론」이란 학생이 꽤 유망했는데 졸업후에는 자기 본국으로 갔고,「케임브리지」대학 일본어과에서 만엽집에 나타난 고대일본어 발음에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스킬런드」(Skillend)가 가장 열성적이요, 또한 촉망을 받게되어 결국 내가 그대학을 떠나면서 나의 후계자로 추천되어 오늘날까지 그가 그 대학 한국어과의 책임자로남아있다.
요즘 그는 한국의 초기 현대소설연구에 관심을 갖고 수차내한한 일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이외에도 여러군데서 한국어번역이나 한국문화에 대한 조회가 오면 그것을 맡아서 답을 해주었고, 따로 동양음악동호회(동양음악동호회)를 위해서 내가 갖고간 한국아악·민요등의 축음기만을 틀며 강연도 해주고 기타우표수집가를 위해서 한국우표에 대한 글도 그들의 잡지에다 발표해주었다.
그뿐만아니라 1951년 봄인가 한국전쟁 전선을 시찰하고 왔다는 영국 군인 대위 한사람이 중공측에 가까운 영중친선협회의 주최로 강연을 한 일이 있는데, 그때 그의 보고는 괜찮았으나, 그모임을 주재하는 그협회의 회장이란 사람이 사회를 하면서 남한이 먼저 북한을 침입했다는 뜻을 말했다. 나는 이말에 분격해서 즉석에서 손을 들고 기립해서 그런게 아니라 내가 6·25 당시 서울서 실제로 경험한 것을 보고하면서 북한괴뢰집단이 갑자기 대한민국을 침입했다는말로 그를 반박했다.
그런데 나중에알고 보니 그회장이 내가 봉직하고 있던 그대학의 평의원중의 한사람이었고, 그전에는 중공에 영사로 부임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이 우리과의 주임보고그 반박한 한국사람이 누구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상오11시 선생들의 휴게실에서「코피·타임」이있고, 점심시간은 영국전체 습관으로 2시간, 그리고 하오4시에는 「티·타임」이 같은 장소에 있어 향수(향수)를 달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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