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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은 남아의 인종전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남부「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백인식민주의와 인종주의 최후의 아성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60년대 초에 「가나」「콩고」「탄자니아」「잼비아」를 기점으로 일어났던 검은 민족주의는 처음부터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을 종착역으로 삼고 있었다.
때마침 「검은 세력」과 「하얀 세력」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포르투갈」식민지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독립하면서부터 양측간의 완충지대는 사라지고 흑백인종의 무력충돌이 거의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모잠비크」와 「로디지아」간의 전쟁원인은 1차적으로는 27만의 「로디지아」백인지배에 대한 6백만 흑인주민의 독립운동의 여파다. 이점은 너무나 자명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한 것이라서, 현지 백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아프리카」인의 독립자체를 나쁘다 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지역 검은 민족주의의 「헤게모니」가 누구의 실책 때문에 온건파로부터 강경파의 수중으로 넘어가게끔 돼버렸느냐 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라 하겠다.
그리고 검은 민족주의 지원의 대의명분을 빙자하여 「아프리카」경영에 날쌔게 뛰어든「모스크바」의 기선에 대해 서방측의 방비책이 왜 그리 미지근한가 하는 의구심이다.
앞뒤 사경을 들아 볼 때, 그와 같은 사태의 책임은 「로디지아」의 현 「이언·스미드」정부의 실책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스미드」정부가 세계 여론과 인종평등의 대의를 승복하고 진작부터 흑인독립단체의 온건파와 타협했더라면 강경파의 「게릴라」투쟁이나 외부의 개입도 둔화시킬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스미드」정부는 영본국의 만류조차 뿌리치고 65년 일방독립을 선언한 이래 줄곧 가혹한 격리탄압으로 흑인주민들의 생존권을 묵살해왔다.
심지어는 온건파 흑인지도자 「응코모」와의 협상과정에서 정권이양시기를 20년, 30년 뒤로 미루자고 고집함으로써 마지막 타협의 기회마저 박차버렸다.
이것은 자연히 「응코모」의 후퇴와 강경파 「시톨레」의 등장을 초래했으며 강경파를 꼬드기는 「모스크바」에 개인의 기회를 준 결과가 되었다. 「스미드」정부의 그와 같은 편협성은서방측의 입장마저 궁지에 몰아넣고 말았다. 도와주고 싶어도 선뜻 도와주지를 못하게 만든 것이다. 미국의 의회마저 무기수출규제법을 만들어서 인종차별국가에는 개입은 커녕 무기도체대로 대주지 못하게 못박았다.
심지어는 영국의 「윌슨」수상이나 「아프리카」우경지도자 「이디·아민」, 「로마」교황까지도 「로디지아」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명백히 했다.
모두가 「로디지아」백인들을 편들 명분을 못 찾기 때문이다. 이점은 16세기 이래의 비극과 관련된다. 16세기에 「모잠비크」에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은 『문명개화의 필요한 조건』이란 명색으로 흑인노예들을 대거 「요하네스버그」의 광산으로 실어 갔었다. 4백년이 지난 오늘날 그 후예들은 『노예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모잠비크」를 기점으로 「나미비아」와 「로디지아」를 거쳐 또다시 「요하네스버그」로 몰려가려는 기세다.
「나미비아」에는 SWAPO라는 흑인단체를 이끄는 「삼·누조마」가 「게릴라」전을 개시하고 있다.
여기서도 남아공이 「유엔」의 자결원칙을 무시한 채 71만의 흑인에 대한 9만의 백인통치를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남아공은 할 수 없이 흑인세력에 「데탕트」를 제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아인구의 70%인 흑인을 13%의 토지에 몰아넣고 교회좌석에까지 흑백을 분리하는 격리계획이 존속하는 한 때늦은 「데탕트」란 이제 소용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방측이 무턱대고 좌시만 할 처지도 아니다.
하루빨리 「스미드」정부와 남아공의 편협한 인종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아프리카」정책을 공동입안 해 흑인온건파와의 타협과 공존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구현된다면 「모스크바」와 「쿠바」개인을 막는 길도 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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