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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병자호란과 지천 최명길|대표집필 이종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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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영영 가실 수 없는 상처>
촉숙과 태평. 이에 따른 퇴폐가 계속되다가 치르게된 전후 7년의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의역사를 양분할 정도의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전란은 여하튼 일본군의 퇴각으로 끝이 났다.
불시에 일본의 침략을 받아 2주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명에 원병을 청하는 등, 과히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 있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적에게 무릎을 꿇는 곤욕만은 없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민족사의 치부로는 생각하지 않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그 뒤 40여년 만에 일어난 인조14년(1636)의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은 이와 판이하다. 청태종이 이끄는 청·몽·한인으로 혼성된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인조14년 12월9일이었다.
14일에 청군의 선봉이 홍제원에 이르러 막 강을 차단하자 인조는 강화로 피하는 것을 단념하고 수구문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바로 뒤를 쫓던 청병은 아무 저항도 안 받고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혹한과 기아 속에서 40여일을 지낸다.
그동안 성내에서는 주전이냐, 강화냐로 여러 번 논쟁이 거듭된다. 날이 갈수록 강화에 찬성하는 수가 늘어난다. 주전파 역시 이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대세는 더욱 강화론으로 기운다.
항복의 조건을 교섭하는 사절이 서로간에 몇 차례 오고간 뒤에 조선은 청의 강요에 따르게 된다. 이듬해 정월30일, 인조는 만성호곡 속에 남한의 서문으로 나아가 삼전도에서 성하지맹을 행한다. 청태종은 그곳에 9층의 수항단을 마련하여 그 단상에 앉아 남면하고, 인조는 북면하여 땅에서 이른바 「삼배구고두」의 비예 행한다.
한마디로 군신의 의를 맺은 것이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청을 섬기겠다는 약조를 하게된 것이다. 그동안 청군의 행패가 우심하였기로 그 기간으로 보아 임진왜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수모만은 영영 가실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 4자의 상형문자를 볼 때마다 우리 민족이 애달프게 여기는 데는 이같은 까닭이 있다.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일종의 영웅사관에서 나온 말이겠지만『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는 논의가 있다. 역사를 보는데 어떤 개인보다는 사회니 민족이니 하는 집단의 입장을 위주로 하는 오늘날에는 진부하게 들리기조차 하지만, 어떤 개인이든지 복잡한 역사의 조건을 배경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사회 속의 개인, 민족 속의 개인이 된다. 가령 우리가 유성룡·이순신·서산대사, 또 그밖에 누구누구 하는 의병장을 임진왜란이란 테두리를 떠나서 논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시대와 인물과의 관계는 이와 같은 것이다.
이런 뜻에서 지천 최명길(1586∼l647)이라면 병자호란 때의 주화론자로 항복문을 기초하였던, 이를테면 민족의 치욕을 한 몸에 지닌, 또는 민족의 수모를 주도하였던 인물로 좀 개운치 못한 가운데 기억되어 왔다. 사림에서 두고두고 그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았던 데는 그럴만한 건덕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인물을 보는 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전에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던 사람이 지금은 평범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역사서술에서 자취를 감추는 일도 있겠고, 반대로 전에는 대단히 여겨지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최명길도 오늘의 안목에서 마땅히 재평가·재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전형적인 사대부의 집안에 태어나 선조38년 약관 20세 때 과거에 급제한다. 이어 공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광해군4년에는 병조정랑에 이르니 순탄한 사관의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2년 후에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뒤 그 모후를 폐하려는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파직된다. 이덕형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이원익이 파직되고, 남이 공이 전리방귀되던 무렵의 일이다.
그는 가평으로 내려가 장유·이시백 등과 교유하며 양명학의 연구에 몰두한다. 양명학은 퇴계 이황이 왕양명의 『전습록』을 배격하는 논변을 남긴 뒤로 조선의 유학계를 장악하였던 정주학파에 의해 이단사설로 몰리던 학문이었으므로 그 전파는 완전히 봉쇄되고 있었다. 따라서 최명길은 이를 독습하게 된다.
그 몇 해후 광해군의 패륜행위를 규탄하는「쿠데타」즉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 성공하여 정사1등 공신이 되어 관직에 돌아온다. 그와 인조와의 깊은 관계는 이 때부터 맺어진다. 그는 이례의 승진을 거듭하여 이미 30대에 이조참판·부제학 등의 요직에 올라 젊은 관료로서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으다시피 된다.

<정묘호란 때도 강화주장>
때 마침 「정묘호란」(l627)이 일어난다. 후금(뒤의 청)이 출병한 표면상 이유는『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질풍과 같은 진군으로 안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인조는 강화로 피병하였다. 한편 평양을 지나 황주에 이른 후금 군은 요구조건을 걸고 화의를 교섭하였다. 이 때 후금군의 본 진이 있던 평산과 강화의 거리는 1백여리에 불과했다. 강화의 수비는 박약하여 모두 위기를 느끼고 있었으나 감히 강화를 공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최명길만은 대세로 보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인조는 그의 의견대로 화의에 응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은 명과 후금과의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내용으로 형제의 맹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후금으로서 이것은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해 내몽고에 들어가 만주의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부근까지 공략하는 등 기세가 등등하던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도 위약이 잦아졌다.
이에 조선의 격앙은 절정에 달하니 주전론이 지배하게 되었다. 도원수 김시양이 『강약이 부동하니 그 환심을 잃지 않는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가 파직되었으며, 인조는 친정을 의해 군비를 갖추고 그 길에 오르려고까지 하였다. 뒤에 「삼학사」로 불리는 오달제·윤집 등은 최명길의 참수를 주장하였다. 잠시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청태종은 이같은 기운이 갈수록 높아지자 발병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를 묵살하였으므로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병자년에 청군이 홍제원에 이르렀을 때 인조는 아직 서울을 못 떠나고 있었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으나 이조판서 최명길이 적진에 나아가서 주육을 대접하며 출병의 이유를 묻는 수작을 꾸며 시간을 끄는 동안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적진에 나아가 시간 끌어>
남한산성에는 겨우 50일을 견딜만한 군량이 있을 뿐이었다. 이미 포위되어 내외의 연락이 끊어지니 의지할 곳이라고는 없었다. 남은 계책은 뻔하다. 싸우든지 강화하는 길 밖에 없다. 싸우려니 믿을 만한 군사가 없다. 강화에 대하여는 모두가 꺼리는 바이다. 그렇다면 이 고성에서 장차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처음부터 화의를 주장하고 주담하였다.
최명길의 죄목은 화의다. 바꾸어 말하면 군왕과 국가를 때어버리고라도 그 때 팽배하던「대의」를 표방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의 대의란 명에 대한 구의를 말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해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화인 명을 위하여 나라를 없앨지언정 이적인 청과 싸워서 역사를 더럽히지 않았어야 옳단 말인가.
흔히 의와 이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갈림길은 아주 미묘하다. 오직 독지하는 곳에서 갈린다면 최명길은 과연 의대로 나간 것인가, 의를 저버린 것인가.
그 비난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보를 양하여 인조를 위하지 않거나, 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나 알지, 남이 어찌 알겠는가하는 그 나는 못 속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조와 조선을 잊으려해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일세는 물론 천추의 비방도 두려울 바가 아니었다. 다만 군왕과 국가를 위하는데 기사나 이욕이 끼여들어서는 안되겠다는 걱정뿐이었다.
그가 서슴지 않고 이같은 주장을 내세운 것은 원래 타고난 그릇에 양명학에서 득력한 바크다고 보아야겠다. 허와 가를 통박하는 양명학의 진수에 이른 학자인 때문이었다.

<양명학서 큰 영향받아>
인조보다 한발 앞서 강화에 들어갔던 왕족과 중신도 많았지만 강화는 일전할 겨를도 없이 남한산성보다도 먼저 함락되었다. 이에 척화파의 김상용·이상길 등은 방화 자살하였으며, 부녀자의 순절자도 적지 않았다. 한편 남한산성에서는 김상헌·정온 등이 자살을 꾀하였다. 또 끝내 화의를 반대하던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소위「삼학사」가 난 후에 심양으로 끌려가 형사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청과의 관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많은 문제를 남겼다. 삼전도의 약조에는『청이 요구할 때는 조선은 출병의 의무가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오래지 않아 청은 출병을 요구하였다. 물론 명을 치기 위한 군사다.
이 때 의정으로 군국의 대사를 맡았던 최명길은 『비록 청과의 약속이 있어도 명을 조공함은 의가 아니니, 이 일 때문에 몇몇 대신이 목숨을 바쳐야 할 듯 한데 내가 자당 하겠다』며 두 차례나 심양에 들어가 국내의 정상을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임경업이 명과 소통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에 최명길도 임경업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답문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다. 군왕이나 정신은 모두 모르는 사실이다. 임경업은 내 명령을 받들었을 뿐이다』라고 매사를 자당하고 나서니 청인들도 『최각로의 간장은 칠석 같다』면서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후3년 심양에 수금되었다가 소헌세자와 봉림대군(뒤의 효종)이 방환될 때 함께 돌아오니 이로써 전후의 문제는 일단락이 되고 청에 대하여도 표면상으로는「사대」의 예가 계속 지켜지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숭명배청의 경향이 날로 굳어져 급기야는「북벌론」까지 대두하였으니 이 때에 사무친 원한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던 듯 하다.
이와 같은 난국에서 곤욕을 미봉하는데 분망하였던 최명길을 논함에 있어 공과양론이 나온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끝내 모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 뒤의 상황을 생각한다든지, 정주의 학만을 승봉하고 그 밖의 주장이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고루한 학풍을 생각한다면 최명길은 분명히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요즈음 사회과학에서는 어떤 인물의 「액션」보다는「리액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상황 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의 유형을 따져가며 그 인물의 자기동일성을 찾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역사상의 인물도 이런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하느냐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최명길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병자호란을 어떻게 보느냐에 이르는 첩경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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