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비디오아티스트 빌 비올라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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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울먹이고, 남자는 움찔하고, 다른 사내는 멍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인듯 사람들은 제각기 놀람의 몸짓으로 이미지를 발산한다.

미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52)는 이 10분짜리 비디오 작품에 '관찰'이란 단순한 제목을 붙였으나, 희생자들이 늘어나는 시대 분위기는 공감의 파장을 넓혀가고 있다.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는 역사의 격랑을 타고 테러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시장 밖 현실로 관람객들 촉수를 뻗어가게 만든다.

배우 18명이 줄지어 펼치는 경악의 이미지는 눈 깜짝할 새에 과거와 현재를 접붙이며 보는 이를 새 심상(心象)으로 이끈다.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와 이라크전, 대구 지하철 사건 같은 대형 참사로부터 일상의 교통사고나 피붙이의 죽음까지,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 앞에서 관람객은 재난의 이미지 속을 흘러다닌다.

비통에 잠긴 인물들은 보는 이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리인들이다. 그들은 격렬한 고통을,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오래 천천히 '보여준다'. 정화(淨化)이자 배설이다.

비올라는 차가운 기록보다 뜨거운 기억에 몸을 기댔다. 그의 작품은 회화와 영화, 미술관과 극장 두 매체와 장소를 뒤섞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다매체시대의 비디오 아트가 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정지와 운동, 관조와 동화(同化) 사이를 오가며 비올라는 이 인간성 실종의 시대에 가장 첨단의 기술매체로 가장 오래된 영혼에 안식처를 마련한다.

삶과 죽음, 고뇌와 비애 등 인생사의 속깊은 고갱이를 중세나 르네상스, 바로크 회화를 연상시키는 장중하고 극적인 화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고전주의자라 할 수 있다.

45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숲 속 한적한 길을 한 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장면을 잡은 '여정'은 죽음을 향한 육신과 멈출 수 없는 시간의 슬픈 흐름을 움직이는 액자 그림처럼 보여준다.

비올라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고 지속될 것이 슬픔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월 30일까지. 02-735-8449.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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