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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있는 죄? … 당뇨·치매 70대도 생계비 지원 못 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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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충남 예산군에 사는 임모(76)씨는 소득이 전혀 없다. 기초노령연금(월 9만6800원)이 전부다. 자녀들한테 부양을 받지 못한다. 임씨는 2년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자격미달 판정을 받았다. 슬하 5남매 가운데 4명은 소득·재산이 적어 ‘부양능력 없음’으로 분류됐지만 둘째 아들의 인천 아파트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었다. 둘째 아들은 4년 전 큰 병이 생겨 지금까지 입원해 있다. 소득이 없어 아버지를 보살필 수 없다.

 25일 임씨 집 안엔 냉기가 가득했다. 발이 시릴 정도였다. 임씨는 “보일러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난방을 안 한 지 오래됐다. 가끔 전기장판을 켠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당뇨·고혈압·고지혈증을 오래 앓은 데다 2년 전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그 충격으로 초기 치매증상과 우울증이 왔다. 허리 통증이 심해 남의 농사일 거드는 것도 그만뒀다.

충남 예산군에 사는 임모(76)씨는 2년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심사에서 탈락했다. 노령 연금이 수입의 전부인 임씨는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 불을 켜지 않는다. [김성룡 기자]

 충남건강증진센터 박진하 팀장은 “가족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경우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된다”며 “부인 사망 이후 임씨의 병세가 악화한 데다 생활고까지 겹쳐 극단적 행동을 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극빈층 보호의 덫은 ‘부양의무자 기준’이다. 자식의 부양능력을 따져 일정 기준을 넘으면 부모가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정부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한 해에 이 조항에 걸려 2만여 명이 수급자에서 탈락한다. 그동안 부양의무자 기준이 현실에 맞게 많이 완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선에서 경직되게 운영하다 보니 임씨처럼 극빈층이 사각지대에 내몰린다.

 임씨가 수급자가 되려면 둘째 아들 아파트 시세가 떨어져야 한다. 아니면 아들이 아파트를 팔아서 아버지를 부양해야 한다. 아들도 중병에 걸린 상황이어서 그리하기 힘들다. 최악의 경우 부자 관계 단절을 입증하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서먹한 관계라도 1년에 몇 번은 왕래한다. 그러면 공무원이 ‘관계 단절’로 보기 힘들다.

 정보기술 발달이 독이 되기도 한다. 2010년 사회복지통합관리망(행복e음)이 개통되면서 기초수급자 본인과 자녀의 소득·재산이 유리알처럼 드러났다. 투명성이 높아진 것은 좋지만 인정사정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백혈병에 걸린 외손자(20)와 함께 사는 김모(75·전남 해남군)씨는 10여 년 전 기초수급자가 됐다가 지난해 탈락했다. 김씨 아들의 일용근로 소득이 행복e음에 잡혔다. 이 때문에 손자는 의료혜택이 사라져 조혈모세포이식 수술을 포기했다. 2000만~3000만원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김씨 딸(41)은 “주위에 보면 안 받아도 될 사람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왜 정말 어려운 우리는 혜택을 받을 수 없냐”며 울먹였다.

 행복e음 개통 이후 62만여 명이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했고 신규 수급자가 된 사람은 42만 명에 그쳤다. 그래서 기초수급자가 줄어 지난해 말 135만 명으로 떨어졌다. 보건사회연구원 김미곤 박사는 “행복e음이 부정 수급자만 찾아내는 데 활용되고 방치된 극빈층을 찾아내는 기능을 하지 않으면 ‘불행e음’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선진국은 자녀 소득보다는 본인의 형편을 우선적으로 본다. 우리는 본인이 통신기록·통장거래내역 등을 제출해 자식과의 관계 단절을 입증해야 한다. 자식의 금융소득을 조회하려면 동의서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부모가 지레 포기한다.

 고려대 최영준(행정학) 교수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해야 하지만 이보다는 규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선 복지 공무원들이 재량을 발휘할 수 있게 권한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대명 기초보장연구센터장은 “기준을 낮춰 더 많은 사람을 일률적으로 보호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므로 이보다는 빈곤층의 가장 필수적인 욕구인 의료와 주거, 두 가지 지원을 우선적으로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글=박현영·김혜미 기자, 예산=정종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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