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비밀금고 군보르 콕 집은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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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비밀금고 문이 빼꼼히 열렸다. 미국 재무부는 20일 “푸틴이 스위스 군보르(Gunvor)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이 회사 돈에 접근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문제의 군보르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에너지 트레이딩 회사다. 원유와 천연가스 등을 사고팔아 돈을 번다. 비상장 에너지 트레이딩 회사로선 세계에서 가장 크다. 상장 기업까지 따지면 세계 4위다. 글로벌 일일 에너지 거래의 3%를 담당할 정도다.

 이날 로이터통신은 “미 재무부 성명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주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문장”이라고 평했다. 실제 푸틴-군보르 커넥션은 2012년 러시아 대선의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야당은 “군보르 지분 50%가 푸틴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푸틴은 “터무니없다”고 되받아쳤다. 푸틴의 대선 승리로 닫혔던 판도라 상자가 다시 열리고 있는 셈이다.

 미 재무부는 푸틴-군보르 커넥션의 연결고리로 겐나디 팀첸코란 인물을 지목했다. 팀첸코는 군보르 공동 창업자이기도 하다. 미 재무부는 “팀첸코가 에너지 부문에서 하는 일이 푸틴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했다. 팀첸코와 보리스 로텐베르크 부사장의 재산을 동결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경제 제재 칼날이 사실상 푸틴을 겨냥한 셈이다.

 서둘러 군보르는 “미 재무부 발표가 터무니없다”고 정면 반박했다. “우리 회사 주식 85% 정도는 창업자(톰퀴비스트)가, 나머지 15%는 직원들이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직 크렘린 쪽은 쓰다 달다 말이 없다. 대신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갔다. 크림반도 병합을 최종 완료했다. 또 친러시아 시위대가 우크라이나 공군기지를 급습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푸틴을 직접 겨냥한 칼날이 기대한 만큼은 효과적이지 않은 셈이다.

 심지어 미국의 제재 발표 하루 전인 19일 팀첸코가 군보르 지분 43%를 전격적으로 처분했다. 매매 상대는 군보르 공동 창업자인 토브조른 톰퀴비스트였다. 이 인물은 오바마의 제재 칼날을 피할 수 있는 스위스인이다. 팀첸코가 푸틴의 지분을 살짝 명의신탁해 놓은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오바마 폭로가 푸틴의 손톱 밑 가시일 가능성은 있다. 지난해 대선 동안 푸틴은 비밀재산 문제에 시달렸다. 논쟁의 발단은 그의 말이었다. 그는 “(대통령·총리로서) 갤리선 노예처럼 일만 했다”고 말했다. 권력을 이용해 돈을 벌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야당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푸틴의 재산이 400억~700억 달러(약 43조~75조원)에 이른다”며 “핵심 재산이 군보르 지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은 군보르와의 커넥션을 부인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군보르 설립·성장 과정이 러시아 유권자들의 의심을 부추겼다. 군보르는 2000년에 설립됐다. 공동 설립자인 팀첸코와 부사장인 로텐베르크 모두 푸틴의 유도 파트너들이었다. 게다가 군보르는 2004년 40억 달러에 지나지 않던 매출액이 2012년엔 930억 달러로 23배 이상 불어났다. 바로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를 거의 독점적으로 매매한 덕분이었다.

 블룸버그통신은 “오바마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푸틴의 비밀금고 문을 열어 러시아 야당의 반발을 부추기고 있다는 게 정치 분석가들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내부 분란을 겨냥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 바람에 푸틴이 격하게 반발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로이터는 “푸틴 측근들에 대한 제재가 원유와 천연가스 차단 등 모스크바의 극적인 응전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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