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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480) 제47회 전국학련(92)|나의 학생운동 이철승|학련결사대 순천서 반군과 결전|고흥까지 진출한 반군을 여수탈환후 토벌|여수시가전서 손동신동지등 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새 나라를 세운지 두달만에 나라를 지켜야할 군대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앞이 캄캄합니다. 용맹한 군대가 이를 분쇄하고 있지마는 더 좋은 방책이 없을까해서 여러분을 보자고 한 것이니 내게 의견을 말해주시오-.』
이승만대통령은 침통하게 말했다. 그날따라 노대통령의 안면은 더욱 경련했다.
좌중은 물뿌린듯 조용했다. 당시 애국단체대표들은 이대통령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감히 면전에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때 이덕원(고대) 동지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랐다. 본래 학련대표 발언은 신동희부위원장이 하기로 내정했었다. 그가 말을 꺼냈다. 『다름아니라 신생정부에서 논공행상이 잘못 됐읍니다. 친일파나 건국에 공로도 없는 사람을 요직에 앉히니 반란의 수습이 어렵습니다.』 장내는 아연 긴장했다.
노대통령의 얼굴은 더욱 경련하고 옆에 선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후 강원도지사)은 불그락 푸르락 했다.
노대통령은 윤치영 내무장관을 불러 무언가 지시하고선 곧 퇴장했다.
그러나 회의는 애국단체가 구국연맹을 결성, 반란진압에 나서기로 하고 산회했다.
나는 돌아와서 즉시 간부회의를 소집, 「여순반란사건 학련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남반(고병두 오정환 이승철등 7명) 전북반(정진방 송흥국동 7명) 경남반(구흥렬 한남 박후식 하상구등), 그리고 선전부 중심의 선무 공작반을 편성해서 현지로 급파했다.
이에앞서 전남학련은 완전히 전시체제를 갖췄다.
오인제 정현성 정길수 박현채 최길성 최인호 장영식등은 특공대를 결성해서 변장까지 하고 반란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제1대 원주호 이강재 기원희 김의수 정재필 김종환 김상혁, 제2대 박선기 전천수 홍병희 우섭 손수탄 이수엽등의 결사대를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이들이 현지에 달려갔을 때는 순천도 이미 반군의 손에 떨어져 순천시내는 완전히 살인 약탈 방화의 무법천지가 됐다.
20일 새벽 여수를 장악한 반군은 상오7시 통학열차로 순천에 진격했다.
당시 순천역엔 홍순석중위의 철도경찰 1개소대가 있었지만 곧 반군과 합세하여 버렸고 광주주둔 4연대 병력도 전선에 투입됐으나 김영은 중위의 9중대도 반군과 합세했다.
당시 순천의 경찰 총 병력은 인근의 지원을 받아 4백여명이 됐다. 이들은 순천학련생인 성속욱 공주열 박동희 김재호 오철상 김준곤등까지 합쳐 결사전을 폈으나 불과 40여명만 남았을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전남학련은 다시 제3대를 백명호 양승도 이옥문 하쟁구 거영남 박형주등으로, 제5대를 김귀진 홍순기 최형진 양경일 김욱성 성기초 문봉호 정두홍등으로 결사대를 편성,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반군은 여순에 이어 구례 광양 곡성 벌교 보성 고흥등지를 차례로 짓밟았다.
전주엔 수없는 우익 인사의 시체가 널렸다.
이 무차별 살인극은 23일 순천, 26일 여수가 재탈환됨으로써 서서히 가시어갔다.
당시 반군소탕에 앞장선 부대는 총사령관에 송호둔준장, 제2여단(원용덕대령), 제5여단(김백대령), 비행대(김정렬대위), 제3연대(이성가중령·성준호중령), 제6연대(김종갑중령), 제5연대 (백인엽소령), 그리고 경찰과 학련의 혼성부대인 충무부대(대장 김봉운)를 들 수있다.
그러나 도시에서 쫓긴 반도들은 지리산 백운산 희야산 등지로 잠적, 소위 빨치산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공비들은 후일 정일 도강군의 토벌군에 의해 전부 소탕됐다.
여순사건에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백인엽소령과 문인호등지(순사학련) -.
백소령은 군산의 12연대를 이끌고 반도 진압차 21일하오 순천농고에 진주했다. 이땐 순천경찰서에 감금된 우익인사 4백여명이 차례로 총살당하고있던 때였다.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서정화(순중학련생) 동지가 이 사실을 알렸다.
백소령은 즉시 성동욱 순천학련위원장과 서동지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고 2명의 기관총사수를 동승시킨 다음 「지프」를 몰아 반군 수중의 시가로 달러갔다.
기관총을 난사하며 중심부를 꿰뚫자 반도들은 국군 대부대가 진격하는 줄 알고 그만 혼비백산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경찰서 뒷마당에서 총살 직전에 있던 김성초읍장 김희주철도국장등 3백여명을 구출해냈다(1백여명은 이미 총살). 그후 23일 문인호동지는 순천북문지서에 포로가 된 경찰 20여명을 구출코자 단신 소총을 쏘며 돌격하다 장렬한 전사를 하고 말았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것은 손동인(순사) 손속신(순중) 형제학련 「멤버」의 죽음이다.
두 형제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서 김준평 이정두등 학련생 대동청년단장인 황우수 한상갑등과 반도 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포로가 되고 말았으며 반도들은 두형제에게 『앞으로 예수를 믿지 않을것과 학련활동을 안할 것』을 요구했다.
두 형제는 대답했다. 『나는 예수를 믿으며 학련활동을 계속한다.』 결국 두 형제는 무참히 학살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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