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세상보기] 과학의 출발은 비판적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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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관찰하면 자연의 합목적성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배우가 배역을 통해 연극의 목적을 이루듯이, 모든 자연물은 자신의 고유 목적을 향해 나간다는 것이다.

돌이 낙하하는 것은 무겁다는 본성을 지닌 물체가 땅의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목적 때문이고, 돌이 깃털보다 빨리 낙하하는 것은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낙하하려는 본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물체의 낙하 속도가 질량과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준 갈릴레오에 의해 부정됐다.

밤 하늘을 관찰하면 우주 전체가 우리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측이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과 함께 천동설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부정된다. 천동설도 관측 결과를 뒷받침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했으므로, 처음에는 어느 것이 우월한지가 분명치 않았다. 결국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결정적인 판정이 나게 된다.

만유인력이 회전 운동의 구심력을 제공한다는 설명과 함께 지동설은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천사가 천체를 밀고 다닌다는 식의 설명은 더 이상 세계관의 혁명을 막는 저항이 될 수 없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순수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은 모든 경험적인 지식에 앞서 선천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은 그 자체로서 자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 이해의 틀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의해 부정된다.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운동하는 물체와 정지해 있는 물체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운동을 매개로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반상대성 이론에서의 공간의 휨은 공간이 순수직관의 형식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물리 법칙이 분리성과 국소성의 원리 위에서 성립된다고 보고, 이를 기반으로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정보 전달이 불가능한 두 사건의 경우 두 물리계는 서로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이 국소성이고 두 물리계의 상태는 각자의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분리성이다.

이론물리학자 벨은 이 두 원리에 기초해 벨의 부등식을 만들었는데, 이 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교한 실험으로 확인됐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믿었던 두 원리 중에 적어도 하나는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에 대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더 잘 어울리는 것은 현재의 과학이론이 아니라 합목적성이나 천동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 분리성과 국소성 같은 것들이다.

진화론 같은 것은 화석이라도 있지만, 지동설이나 4차원 시공간, 분리성과 국소성을 뛰어넘는 세계의 연관성 같은 것을 실제로 체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근원적인 새 이론은 언제나 상식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이 저항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이 확립됐다.

과학정신은 과학이 어느 다른 학문보다 우월하다거나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어떤 문제이든 근원적인 점에서부터 다시 살펴보는 '깨어있음'과 어떤 도그마도 부정(否定)할 수 있는 '비판적 자세'일 것이다.

양형진 <고려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