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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엄마·아빠들이 뭉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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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정원
서울대 부모협동조합 대표

아이를 하나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도시의 핵가족에게 이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아이가 상호작용할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의 대가족에서라면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그리고 오촌당숙뻘쯤 되는 이웃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엄마 역시 아이가 믿을 만한 누군가의 손에서 재롱을 피우는 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갈 짬이 날 것이다. 또 선배엄마들과 수다를 떨며 아이 키우는 지식과 노하우도 전수받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의 핵가족은 어떠한가? 아이에게 상호작용 대상은 부모가 전부다. 아빠가 직장에 간 동안 아이는 엄마의 ‘껌 딱지’가 된다. 그래서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는 빨래할 시간도, 밥 먹을 틈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짬도 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도시에서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가 직장을 따라 모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서툰 초보엄마에게 육아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두려움을 토닥거려줄 만한 선배엄마를 찾기가 힘들다. 도시의 핵가족에서 초보엄마는 외로운 섬이 되어 아이와 함께 시멘트벽 속에 갇힌 것 같은 느낌에 우울하다.

 나는 아이 키우는 엄마들을 사귀고 싶었다. 보건소에 가면 비슷한 또래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과 사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예방접종을 하러 보건소에 갔을 때 모유수유실에 앉아 다른 엄마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낡은 아기띠를 하고 간 나는 수입 명품 아기띠를 주제로 한 대화에 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다음 번에는 이마에 ‘서울대 졸업’이라고 쓰고 가라고 했다. 그럼 그걸 본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그러다 동네의 아줌마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네의 선배엄마들에게서 우는 아이를 달래는 법, 아픈 아이에게 약 먹이는 요령을 배웠다. 그리고 기저귀가 싼 할인마트, 항생제를 적게 쓰는 병원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복학을 준비하면서 학교에 아이를 가진 학생들의 모임인 맘인스누(Mom in SNU)를 만들었다. 학교 홈페이지에 모임을 알리자 학문적 커리어를 쌓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 임신해서 출산을 목전에 둔 대학원생들이 모였다. 우리는 인터넷 카페에서 출산과 육아의 경험을 나누었다. 매주 목요일 점심모임을 통해 얼굴을 익혔다. 날씨가 좋은 휴일에는 아이를 데리고 만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우리가 아이를 함께 키우는 마을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또 모임이 회를 거듭하며 출산 후 경력단절이 우리의 공통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만큼 키우거나 누군가에게 맡기기 전까지는 강의실에 갈 수도, 연구실에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예쁜 아가야. 어서 자라다오’라고 되뇌며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는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것이 과연 서울대에 다니는 엄마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이와 함께 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벽에 막힌 엄마들은 서울대학교에만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경력을 추구하는 여성들은 대동소이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저런 벽 속에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육아와 경력이 충돌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창조해내면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조직문화를 설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이를 낳아 키운, 생전 배워보지 않은 그 일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대한의 아줌마가 아니던가? 포기하지 않고 벽돌을 한 장씩 놓다보면, 조금씩 그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서울대의 엄마학생들이 지난 2년간 노력해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주차편의를 제공받을 수도 있게 된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다면 육아와 경력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은 조금씩 넓어질 것이다.

서정원 서울대 부모협동조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