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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男子는 괴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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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는 1970년 상영한 영화 ‘남자는 괴로워’(감독 김수용, 주연 구봉서)의 포스터입니다. 일부 문구를 지운 것을 제외하곤 당시 포스터를 그대로 실었습니다.

“남자는 괴로워.” 사실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세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매체인 영화만 들여다봐도 잘 알 수 있다. 1970년에 이미 ‘남자는 괴로워’(감독 김수용, 주연 구봉서)란 제목의 영화가 나왔고, 94년에도 똑같은 이름의 영화(감독 이명세, 주연 안성기)가 다시 등장했을 정도다. 제목은 좀 다르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63년엔 비슷한 분위기의 ‘남자는 안 팔려’(감독 임권택, 주연 구봉서)란 코미디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당시 한 신문기사는 이 영화를 ‘여존남비(女尊南卑·여자는 높고 남자는 낮다)의 사회현상을 풍자한 코미디’라고 소개했다. 아니, 60년대에 남존여비도 아니고 여존남비라니-. 정말 현실이 그랬든 지나친 과장이든, 하여간 남자가 느끼는 괴로움은 이렇게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게 있다. 남자가 괴로운 건 시대불문 매한가지이지만 괴로운 이유는 상당히 ‘진화’했다는 거다. 70년판 ‘남자는 괴로워’의 영화 포스터 속 카피는 ‘괴로운 男性世界(남성세계)의 全部(전부)’다. 두루뭉술하게 남자로 산다는 것의 고달픔을 얘기한다. 남자니까 괴롭다는 거다. 94년판 ‘남자는 괴로워’는 좀더 구체적이다. 영화사는 ‘찬란한 꿈을 월급봉투 속에 가둔 채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지친 삶 살고 있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그린 블랙 코미디’라고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한다. 돈 벌랴, 가족 부양하랴, 가부장제 아래서 존경받는 남성으로 살아가기 괴롭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2014년을 살아가는 남자는 대체 뭐가 괴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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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요구받던 가부장적 남성상에다 탈권위까지, 전혀 다른 두 가치를 동시에 따르라는 요구를 받는다. 게다가 과거에 누리던 여러 권리는 사회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남자들이 정신을 못차릴 수밖에 없다.”

 윤대현(46)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시대 남자가 괴로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경제적인 환경이 급격하게 달라지면서 남성에게 요구하는 게 그만큼 많아지고, 살아남으려고 이를 열심히 좇다보니 남자가 힘들다는 얘기다.

 실제로 과거에는 남자가 대충 무시하고 살아도 아무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그러면 절대 안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젊음과 여자다.

괴롭다, 젊음과 경쟁하랴

 중년 남성 사이에서 동안·몸짱 열풍이 분 건 꽤 오래된 얘기다. 오죽하면 ‘꽃중년’이라는 말이 다 나왔을까. 하지만 점점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 사이에선 젊음을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거의 강박에 가깝다. 그런 마음이 운동이나 피부 관리 등으로 나타난다.

 윤 교수는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남자가 자기 몸을 가꾸는 건 젊음을 유지해서 젊은 사람이랑 경쟁하겠다는 심리”라고 분석한다. 그는 “시대가 달라졌다”며 “전에는 직장 안에서라면 단지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수 있었지만 이젠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떠받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배들처럼 열심히 살았고, 선배들이 올랐던 그 자리에 오르면 선배들만큼 많은 걸 자동적으로 갖게 될 걸로 기대했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니 이젠 그냥 늙은 남자 취급을 받는다는 얘기다. 대접받으려고 하다간 ‘꼰대’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나에게 ‘권위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거다. 허무가 몰려와 괴롭기 그지없다.

 윤 교수는 “아무 증상도 없는데 정신과 클리닉을 찾는 최고경영자(CEO)가 많다”며 “허무를 이기려고 운동을 해보지만 즐기는 게 아니라 모범생 스타일로 숙제하듯 하니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여성이 많은 직장일수록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직장 안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권력 있는 남자보다 ‘여자 보기에’ 매력적인 남자가 통하는 세상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살아남으려면 젊음을 유지해 경쟁력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달리는 거다.

 그렇다면 피부과를 찾는 중년 남자가 느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들을 접하는 의사들은 “남성의 생존전략”이라고 풀이한다.

 피부과는 원래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다. 무슨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피부를 관리하기 위해 주로 피부과를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앤박피부과의 23개 지점 가운데 유독 분당 서현점은 남성 환자 비율이 높다. 다른 곳의 남성 대 여성 비율이 2대 8이라면, 이곳은 4대 6 정도로 거의 대등하다. 이 병원 홍보팀 황은주 과장은 “대기업 다니는 남성이 인근에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승진시험이나 인사철을 앞두고 ‘늙어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에 피부를 팽팽하게 당겨주는 레이저 시술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한번에 200만원쯤하는 고가(高價)라도 수술 받은 다음날부터 바로 활동할 수 있어 선호한다는 것이다.

 조애경 WE클리닉(가정의학과) 원장도 “남자 환자 중 사업하는 사람이 많지만 대기업 고위직도 적지 않다”며 “회사를 옮길 때나 인사철에 주로 몰린다”고 말했다.

 젊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 아니라 젊은 부하직원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기본이 됐다. 전에는 아랫사람이 무조건 상사에게 맞췄다면 이젠 오히려 상사가 아랫사람과 코드를 맞춰야 한다.

 이석우(48) 카카오 대표는 “정보기술(IT) 분야에 몸담고 있어서인지 어린 친구들이 많다”며 “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던 것도 요즘에 많이 신경쓴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 TV 프로그램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부러 ‘공부’한다는 거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하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괴롭다, 여성들 눈치보랴

 “살 안찌려고 계속 다이어트 신경쓰고 옷도 깔끔하게 입으려고 노력해요. 살찌면 나이들어 보이니까. 그리고 나이들어 보이면 여자들이 싫어하니까.”

 여자 동료는 물론 상사도 적지 않은 한 홍보회사에 다니는 박모(37) 팀장 얘기다. 그는 남들이 알아줄 정도로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늘 멋스럽게 차려입는 건 물론이요, 깔끔한 인상을 주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 그래서 주변에선 다들 “원래 그루밍(꾸미기)에 관심 많은 남자”로 본다. 그러나 그가 털어놓는 속내는 전혀 달랐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부장이 있는데 완전 아저씨 스타일이에요. 여자들이 그 부장이랑은 같이 일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아니, 말도 별로 섞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걸 간파하고 외모를 좀더 근사하게 꾸민다는 게 그의 주장. 다시 말해 여성이 많은 조직에서 일하려면 여자들 눈에 보기 좋은 남자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다. 그는 “여자 상사는 외모를 통해 어떤 인상을 받느냐에 따라 업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더라”며 “같이 일하고 싶은 이미지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니 잠깐.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사실 외모 경쟁력을 알게 모르게 요구받아온 건 늘 여성이었다. 능력보다 외모로 평가받는 분위기 말이다. 심지어 여성 장관에게까지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 그런데 이제 남자 역시 여자가 지난 수십 년간 일터에서 받았던 외모 스트레스를 받게 된 거다.

 윤 교수는 “업무평가와 무관하게 남자가 외모에 신경쓴다는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그만큼 세졌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김갑유(52) 법무법인 태평양 대표 변호사도 똑같은 얘기를 한다. “남자가 외모에 신경쓰는 건 여성의 파워가 세졌기 때문”이라며 “여자가 원하는 이미지가 달라졌고, 남자가 그에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있다. 로펌은 물론 판검사 중에서도 여성 비율이 급속히 늘면서 여성 눈치를 안 볼 수없는 상황이 됐다는 얘기다. 1990년대까지 2~3%대에 불과하던 여성 판사 비율이 이젠 27%로 미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김 변호사는 “과거엔 전문직일수록 여자가 워낙 소수이다보니 그 판에 들어온 여자한테 남자 기준을 맞추라고 하면 그만이었다”며 “하지만 이젠 여자가 워낙 늘다보니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전에는 여자가 남자 기준, 다시 말해 조직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됐지만, 이젠 거꾸로 조직 내 남자가 모든 면에서 여자를 존중하고 신경써야 한다는 거다.

 달라진 환경을 체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남녀간 커뮤니케이션(소통) 방식이 달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더 그렇다.

 김 변호사는 “지금까지의 조직은 개개인의 감정엔 관심이 없었다”며 “남자는 자기 감정은 자기가 해결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여자는 감정이 상했을 때 위로받지 않으면 그냥 덮고 넘어가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외국계 IT기업에 다니는 김모(43) 부장은 “남자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욕이나 음담패설을 하는데 이걸 똑같이 여성 동료에게 했다간 바로 변태로 몰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이걸 푸는 방식도 어렵다. 그는 “여성 상사가 언짢아하면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한다”며 “어설프게 재롱부리면 ‘내가 쉬워 보이냐’고 오히려 화를 내는 등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팀장도 동의했다. “여성 상사 감정을 상하게 하면 감성적 측면은 빼고 이성적으로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한다”며 “아예 이런 달라진 환경을 무시하면 모르지만 회사 생활을 잘 해보려고 한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더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이와 관련한 주제로 특강을 요청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윤 교수는 “기업에서 요청하는 강연 주제가 전에는 일반적인 스트레스 관리였다면 지금은 남녀 차이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요구한다”며 “심지어 성희롱 관련 주제를 요청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양성평등은 남성 불평등과 동의어?

 남자는 곳곳이 지뢰밭이다. 성희롱 문제도 그중 하나다. 성희롱의 범위가 과거보다 훨씬 넓어진 데다 한번 성희롱범으로 몰리면 그야말로 인생 종 쳐야할 정도로 처벌도 가혹하게 바뀐 탓이다. “여자가 무섭다”고까지 말하는 건 이런 이유다.

 그렇다보니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라면 다들 여자 앞에서 말조심을 한다. 박 팀장은 “말을 편하게 하면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일부러 말을 느리게 한다”고 말한다.

 말뿐이 아니다. 시선 처리도 어렵다. 가슴이 깊게 패인 옷이나 무릎 위로 올라오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직원이 앞에 오면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아예 자리를 피하기도 한단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치명적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니 이런 상황을 미리 피하려는 거다. 그래서 여자 동료 앞에선 아예 두 손을 맞잡고 있는다는 사람까지 있다. 일을 하다보면 이래저래 가볍게 닿을 수 있는데 오해받을 수 있으니 아예 손을 자기 스스로 묶어버리는 거다.

 이런 달라진 환경 자체가 남자들한테는 스트레스다. 지금 높은 자리에 오른 웬만한 40~50대 남성라면 과거 술자리에서 부하 여직원과 ‘블루스’ 추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아, 그런데 불과 십수년 만에 세상이 이리도 팍팍해졌다.

 이런 환경에 한번도 노출된 적 없는 젊은 남자는 다른 이유에서 힘들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박 팀장의 경험담.

 “한번은 점심 먹고 들어오는데 한 여성 상사가 뒤에서 ‘나 아는 남자가 철인삼종 경기를 하더니 힙업이 됐더라고, 박 팀장 엉덩이를 보니까 그 친구가 생각나네’라는 거다. 그 자리에선 그냥 웃어 넘겼는데 유쾌하진 않았다. 남자는 다들 조심하는데 여자는 대부분 성희롱에 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다. 훈련이 전혀 안 돼 있다.”

 심지어 여성 비중이 높은 한 기업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직원 수십 명 중 참석한 남직원이 딱 2명뿐인 회식 자리였는데 한 여자 임원이 “가슴 좋다”며 여직원들한테 그 남자 직원 가슴을 모두 만져보라고 한 거다.

 이 말을 듣는 남자는 다들 이렇게 말한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봐라. 남자 임원이 그랬다면 그 파장이 어땠을지.”

 비단 성희롱 문제만이 아니라 달라진 세상이 온통 남성 본능에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 시대가 원하는 건 전부 여성이 유리한 것들이라는 말이다.

 김 변호사는 “깔끔한 외모와 싹싹한 성격 등 과거 여성에게 요구하던 걸 이젠 남자에게도 요구한다”며 “양성평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실은 양성평등이란 남성에겐 불평등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잘 하고, 남성은 약한 부분이라는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상은 달라졌으니까. 그래서 남자는 또 괴롭다.

안혜리·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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