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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바람 속 민족주의 기승 … 늘어가는 지구촌 화약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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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03면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민족주의가 새롭게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가를 등에 업은 전통적 민족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물론 자원 민족주의나 사이버 민족주의 등 새로운 유형의 민족주의도 등장했다. 또 기존 국가로부터 분리와 독립을 추진하는 하부 민족주의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모순, 민족주의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는 전통적 민족주의의 충돌과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일어나는 지역이다. 2012년 등장한 아베 정권은 인구 고령화와 장기 불황으로 쇠퇴하는 일본을 민족주의를 동원해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 역시 성공적인 경제발전에 부응하는 군사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추구하는 한편 공산당 독재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민족주의로 무마시키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아는 1차 대전 직전 유럽 닮아
지금의 동북아는 불행히도 쇠퇴하는 영국과 상승하는 독일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면서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100년 전의 유럽을 연상시킨다. 국제적 지위의 급격한 변화는 독일이나 중국처럼 부상하는 나라에 자만심을 불어넣는다. 반면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하락하는 나라는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힌다. 이 때문에 구조적 변화 속에서 민족주의를 불러내는 유혹은 강하다.

거대한 제국은 인구의 구성과 분포가 복잡하기 마련이라 붕괴되는 과정에서 필연코 빈번한 민족주의 충돌을 초래한다. 세계는 아직도 소련 제국이 무너지면서 남긴 지뢰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는 친(親)유럽적 서부와 친러시아적 동부, 그리고 러시아의 민족주의가 복합적으로 경쟁하고 부딪치면서 발생했다. 혁명으로 수립된 우크라이나 임시정부가 강력한 러시아의 개입에 맞서는 상황에서 이 나라의 미래는 러시아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 지역 주민들이 애국심과 종족적 동질성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할지에 달려 있다.

이미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자원 민족주의는 21세기에도 경제위기를 틈타 급부상했다. 일례로 지난 1월 국제시장에서 니켈 가격이 급등했는데,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가공하지 않은 니켈 원석의 수출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도 광물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다국적 기업에 대한 세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남아공에서는 광산 다국적 기업에 대한 50%의 초과이득세를 도입하려 하고 있으며, 가나·기니·잠비아 등은 로열티와 세금을 올리거나 초과이득세를 신설했다.

이처럼 자원 민족주의는 국제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자원은 새로운 하부 민족주의를 자극해 국가 분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2011년 수단에서 남수단이 독립한 중요한 이유는 남부에 집중된 석유 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 나치즘을 잉태했듯이 21세기에도 경제위기는 다양한 극단적 민족주의를 불러오고 있다. 예컨대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그리스를 강타했고, 이 나라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의 극약 처방은 극우 민족주의의 부상을 가져왔다. 그 결과 조직적 폭력을 행사하고 살인사건에도 연루되었던 황금새벽당은 2012년 총선에서 7%의 득표율로 18석을 얻어 의회에 진출했다.

세계화는 자본과 시장의 통합뿐 아니라 이민이라는 인구 이동을 동반한다. 유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극우 민족주의는 반이민 정서에 기초한다. 프랑스의 민족전선이나 네덜란드의 자유당, 그리고 영국의 통합왕국(UK)독립당 등은 이민자 집단에 대한 반감을 자극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유럽에서는 세계화와 유럽통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반이민 정서가 강화되면서 오는 5월 말 치러질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세력이 크게 선전할 것으로 예측된다. 일부 여론조사는 극우세력이 의석을 현재 12%에서 16~25% 수준으로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민족주의와 민족 정체성 구분해야
한 나라 안에서도 불평등한 경제발전과 이주로 인한 인구 불균형은 하부 민족주의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다. 최근 중국 쿤밍의 칼부림 테러로 부각된 위구르 민족주의는 경제발전 혜택에서 소외되고 한족의 대규모 이주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신장에서조차 소수로 전락해 가는 위구르족의 위기감을 반영한다. 중국의 중원과 세계의 지붕 티베트를 연결하는 2006년 칭짱열차의 개통은 한족의 지속적이고 위협적인 티베트 관광과 이주를 가져왔고, 이는 2008년 3월 올림픽을 앞두고 발생한 대규모 폭동 사태의 배경이 되었다.

지역 통합을 통해 민족주의를 극복해 보려는 유럽에서조차 하부 민족주의가 국가로부터 탈퇴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올 9월 영국으로부터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될 예정이다. 당황한 영국의 중앙 정치세력은 이례적으로 보수·노동·자유민주당이 합심해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파운드화를 계속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난 2월 밝혔다.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민족주의가 독립의 득실을 계산하는 중이다. 이 경우는 경제가 발달된 카탈루냐, 특히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남미와 스페인 내부로부터의 이민이 증가하면서 카탈루냐의 정체성이 위협 받는다는 인식이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독립적인 언어와 교육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수도 지역인 카스티야와의 경쟁의식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이버 민족주의를 낳았다. 페이스북에는 벨기에의 프랑스어권과 네덜란드어권의 분할을 주장하는 ‘벨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힌두 민족주의의 ‘나는 파키스탄을 증오한다’ 등의 네트워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SNS의 보편화는 화합과 평화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증오와 배타성으로 뭉친 집단에 효율적이고 저렴한 선전 수단을 제공한다.

또 다른 사례로 ‘미국의 보더 패트롤’이라는 국경경비 게임은 멕시코에서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를 총으로 사살하는 프레임이다. 결국 최첨단 소통 수단을 통해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와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감정적 민족주의의 대립은 이전보다 수월해졌고 더욱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다.

세계화를 예찬했던 미국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보호막이 없는 평평한 세계는 강풍과 폭우로부터 피하기 어려운 존재적 불안의 세상이다. 민족주의 담론은 확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심어주고 탄탄한 심리적 뿌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미래와 취약한 현재로부터 도피하기 좋은 안식처다. 정체성의 정치가 세계화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이유다.

민족 정체성은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에 더더욱 필요하다. 그것은 존재를 지켜주는 마음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나 평화, 인권이나 과학 등의 보편적 가치와 기준에서 벗어나면 심각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증오를 자극하고 충돌을 유발하게 되면 커다란 불행과 비극의 씨앗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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