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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89% “한국인 조건은 국적” … 혈통의식 점점 퇴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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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04면

지난 3일 서울 이태원초등학교에서 한 신입생이 왕관을 고쳐 쓰고 있다. 국내 다문화가정 학생은 5만5000여 명으로 전체의 0.86%다. [서울 뉴시스]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 분명하다. ‘민족’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정서를 고려하면서도 표현을 바꾸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다문화 시대 … 변화하는 한국 민족주의

‘개헌 추진 국회의원 모임’의 간사인 우윤근 민주당 의원은 15일 중앙SUNDAY와 통화에서 “헌법 개정을 추진할 경우 전문의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란 대목을 포함해 여러 번 등장하는 ‘민족’이라는 표현을 ‘국민’으로 바꾸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다문화인구(145만 명)가 국민의 2.8%에 달한 현실을 감안해서라고 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선 ‘민족’이란 용어의 사용빈도가 점점 줄고 있다. 예컨대 군은 2011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다”는 장교 임관, 병사 입대선서에서 ‘민족’을 ‘국민’으로 대체했다. 2030년이면 다문화 장병이 1만2000명(전체 복무자의 4.6%)까지 증가할 것을 감안한 조치다. 군은 또 외관상 차이가 명백한 혼혈인을 제2국민역에 배정하던 관행도 2010년부터 없앴다. 이에 따라 현재 300여 명의 다문화장병이 군 복무 중이다.

작가 단체도 ‘민족’ 단어 포기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엔 다문화 학생들의 급증을 고려해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민족’이라는 표현을 뺐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란 대목이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 것이다. 진보적 문인들의 산실이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도 같은 해 “단체명에 들어 있는 ‘민족’이란 표현 때문에 외국에선 파시즘단체, 국내에선 좌파단체로 오해받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작가회의’로 개명했다.

민족 개념의 퇴조는 국민의 변화된 의식에서도 드러난다. 2010년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실시한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에 따르면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한 조건’을 묻는 복수응답형 질문에 ‘대한민국 국적 유지’가 1위(89.4%)를 차지했다. ‘혈통’이란 응답은 84.1%였지만 최하위인 7위를 기록했다.

2005년 이 연구원의 같은 조사에서 ‘혈통’은 4위였지만 5년 만에 3계단 더 추락한 것이다. 또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선 ‘대한민국 국민’(83.8%)이라는 응답이 ‘한(韓)민족’(67.6%)을 앞섰다. “한국은 단일민족국가 대신 다민족·다문화국가가 돼야 한다”는 응답도 60.6%에 이르렀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나라’를 묻는 질문에서도 ‘대한민국’(29.2%)이 ‘고구려’(30.4%)에 이어 2위로 올랐다. 5년 전 조사 결과(고구려 33.7%, 대한민국 24.6%)에 비하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 폭 높아진 것이다.

북한과 통일에 대한 인식 변화도 민족 개념의 약화를 보여 준다. 2010년 EAI 조사에서 ‘남북은 별개의 독립국가’라는 응답이 80.5%에 달했다. 5년 전에 비해 2.8%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대한민국 영토의 범위는 어디까지냐”는 질문에도 ‘남한’이란 응답비율이 48.6%에 달했다. 5년 전(25.2%)에 비해 배 가까이로 높아진 것이다. 특히 20대는 57.4%가 “남한만이 대한민국 영토”라고 했다.

또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 조사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2007년 63.8%에서 지난해 54.8%로 감소한 반면 ‘통일이 필요 없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15.1%에서 23.7%로 늘었다.

서울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통일이 필요하냐는 질문은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나’ 같은 대단히 규범적인 질문임을 감안할 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조사 결과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제는 혈연이나 북한과의 일체감에 기초한 막연하고 애매한 민족주의에서 구체적·근대적 속성을 내포하는 남한만의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의식 속에 민족주의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측면도 많다. 2010년 EAI에 따르면 “외국인의 한국 국적 취득을 쉽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엔 69.1%가 “아니다”고 답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일자리에 위협을 느낀다는 응답(40.3%)과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란 응답(49.5%)도 높게 나타났다. 반면 “자녀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2.5%에 불과했다.

배타·공격성 막는 건 시민정신
전북대 설동훈(사회학) 교수는 “한국 민족주의는 혈통적 친화성과 오랜 역사적 경험의 공유로 인해 세계에서도 가장 응집력이 강한 편”이라며 “국민이 북한을 별개 나라로 인식한다는 여론조사도 남북 관계가 얼어붙은 현실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긴 현상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장도 “세계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유지해 온 종족적 민족 정체성은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사라지거나 약화될 것 같지 않다”며 “대한민국은 당분간 한민족이 다수가 되면서 다른 민족들과 국가를 이뤄 가는 게 현실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배타적 민족주의를 적절히 제어하면서 순기능을 유도해 보편적·민주적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학계의 일치된 제언이다. 정한울 EAI 여론분석센터 부소장은 “민족주의의 배타성·공격성을 막는 일은 결국 국민의 민주적 시민성에 달려 있다”며 “2010년 한국인의 민주적 시민성을 측정한 조사 결과 국적에 대한 배타적 인식이 강한 점 등 일부 문제점이 나타나긴 했지만 전반적으론 20점 만점에 14.2점으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따라서 정부는 인권 보호, 법치 강화 등 민주적 시민성을 증진하는 정책을 펴 우리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줄이고 해외 우수 인력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민족주의의 개방성·유연성을 확대해 국제무대의 무한경쟁에 대처하는 국가적 에너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원택 교수도 “공산당 독재인 중국과 과거사 족쇄에 매인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민주화·산업화의 모범 국가인 만큼 민주적·보편적 민족주의에 관한 한 비교 우위가 크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특히 “이를 활용해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인권 이슈를 주도하고 국내 정치에서도 인권과 법치를 신장시켜 간다면 중·일의 공격적 민족주의를 견제하고 동북아에서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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