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참 낯설다, 대서양에 떠있는 도로 위의 소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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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바다 위의 소녀
쥘 쉬페르비엘 지음
정지현 옮김, 이모션북스
240쪽, 1만4000원

쥘 쉬페르비엘(1884~1960)은 서양문학을 좀 안다는 사람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가 높이 평가했고 말년의 릴케가 그의 열렬한 독자였다는 간접 광고를 믿는다 해도 몹시 독특한 그의 문학세계는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 언저리에 걸쳐진 그의 시와 소설, 특히 ‘콩트 판타스티크(환상적인 단편소설)’는 그런 문학전통이 드문 한국 독자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초현실주의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주적’이며 ‘불가사의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는 숨막힌다.

 대서양 한복판에 떠있는 도로 위의 소녀, 예수 탄생의 곁을 지킨 사려 깊은 소와 당나귀, 익사해 강을 지나 바다로 가며 생각하는 19세 처녀…. 도대체 제대로 된 주인공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야릇한 12편 짧은 소설은 읽어갈수록 막막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절대 고독이 아니라 절절한 쓸쓸함이랄까. 쉬페르비엘이 창조한 환상적 우주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동물과 인간이 뒤섞이며 현실과 몽상이 겹쳐지고 지상과 천상이 뒤집어 진다. 그 속에서 불가능한 대화란 없다. 무한하게 확장되는 심연을 따라 느릿느릿 밀고 가면 그로테스크 하면서도 아름다운 희한한 세계가 펼쳐진다. 저것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나 안타까워 갈급해지는.

 초현실주의를 ‘낡은 정신의 체제와 손을 끊으려는 결의’라 한정해 정의한다면 쉬페르비엘이 창조한 소녀들, 동물들, 불구자들, 죽은 자들만큼 초현실주의적인 존재는 없다. 작가가 묘사한 인간의 조건(‘하늘 위의 다리를 저는 두 사람’)은 기적 없이, 회색 그림자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반복 초상처럼 서늘하게 다가온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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