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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쿠시나가라(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나는 「고라크푸르」의 시가를 벗어나 다시 들판길을 뚫고 불타의 제4성지인 「쿠시나가라」(열반하신 곳)를 향하여 차를 달렸다.
가도가도 끝없는 들판이었다. 하늘과 들판이 서로 머금어 시선이 아물거릴 따름이었다.
나는 그 끝없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조그마한 인간의 존재를 거기에 저울질해 보며, 노래 두어장을 읊어보았다.
눈 감고 헤아리면
우주도 한 오큼인데
다시 보니 지구란 것도
그리 작은게 아니로구나
한 구석, 인도 평야만도
겨웁도록 멀어라
아득한 들판에 서니
인간이란 하루살이 같의
하루살이같은 인간이언만
생각을 다듬고 보면
영원을 입안에 머금고
우물거리기도 하느니
나는 이같이, 큰 것과 작은 것과의 사이, 순간과 영원과의 사이, 공간과 시간을 자질해보면서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려 목적지인 「쿠시나가라」에 도달했었다.
이곳은 옛날 인도 16대국 중의 하나로서 「마가다」 국과 「석가」국의 중간에 있었고 본시 「마라」족 (이른바 역사족)의 영토였기 때문에 「마타」국이라고도 일컫던 곳이다.
또 현응음의에는 「쿠시」는 이름이요, 「나가라」는 성이란 뜻임을 밝혔거니와 그 「쿠지」가 곧 지금 「카시아」의 지명과 같은 것임은 물론이다.
이곳은 한문 경전에 금하라고 적혀 있는 「히란냐바티」강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여기가 바로 불타가 80년 생애의 막을 내리고 조용히 열반에 드신 곳이므로 수많은 참배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더우기, 이 부근에서 「니르바나」(열반)사원이 있었던 곳임을 증거할만한 고대 흙도장이 발견되기도 했고 또 열반탑 가운데서 나온 동판도 있어서, 여기가 바로 기록에 있는 「쿠시나가라」인 것을 확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같이 옛날에는 여기에 큰 탑과 승방들도 많이 있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모두 다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으며, 이로 유적지에서 발견된 누워 계신 불상만이 「버마」사람들의 손으로 새로 지은 「니르바나」 사원 안에 안치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기록을 통해서 보면, 이곳이 황폐하게 된 것이 이미 1천년 이전의 일인 줄을 알 수 있으니, 진작 7세기에 이곳을 순례했던 현장의 기록에 황량한 바람만 부는 곳으로 적혀 있을뿐더러 그 뒤 신라의 혜초 스님이 이곳에 왔을 적에도 의연히 황폐한 모습으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쿠시나가라」에 도착하니 여기는 불타가 열반하신 곳이다. 성은 황폐했고, 사람도 살지 않는다. 다만 불타가 열반하신 자리에 탑이 서 있고, 어떤 선사가 거기에 물을 뿌리며 쓸고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혜초는 다시 이어 이곳의 불교행사를 적었으되
『해마다 8월8일이면 승려와 여승과 속인들까지 여기에 와서 크게 공양을 차린다. 그때 공중에는 깃발이 오르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은 모두다 그것을 우러러보며 이날을 당하여 발심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글 속에 적혀있는 8월8일이란 것에 대해서는 이 같은 것을 상고해볼 수 있다.
불타의 열반하신 날짜에 대해서 경문마다 여러 가지로 적혀 있는데 대반열반경과 선견율 등에는 2월15일로 적혀있어 지금 일반이 그렇게 행하고 있지마는 다른 한편 장아함경과 보살처태경 등에는 2월8일로 적혀있고, 또 서역기에는 「폐사구월」15일에 열반했다고했는데 그것은 3월15일을 말하는 것이요, 또 「가랄저가월」8일에 열반했다 한 것은 9월8일을 일컫는 말이다.
이같이 열반하신 날짜를 여러 가지로 전하는 중에서, 특히 살파다론2에는 8월8일로 적은 것이 있는바, 혜초의 기록에 8월8일이 되면 많은 신도들이 와서 공양을 바친다고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 당시 이곳에서는 불타의 열반하신 날을 8월8일로 지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계속><제자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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